명당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명당엔 양택과 음택이 있다고 합니다. 음택은 묏자리인데 여러 대 자손에게까지 이어지지만 양택 곧 집 자리는 보통 당대에 끝이 난다고 하지요. 그러나 양택일지라도 여러 대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덕을 베푸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300년 동안이나 만석지기로 이어온 경주 교동 최부자집이 그곳입니다. 최부자집의 시작은 임진ㆍ정유 양란 때 큰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싸우다 전사한 최진립(1568~1636)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어 1947년 대부분 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하고 스스로 평범한 중산층으로 내려온 12대 최준(1884~1970) 선생에게로 이어집니다.
12대를 내려오는 동안 지켜진 가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또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라든지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라는 것들도 있습니다. 최부자집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집안에서 쓰고, 1천 석은 손님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덕분에 최부자집은 동학혁명군에게도 다치지 않았다고 하지요.
최부자집은 대를 이어 어려운 이들과 함께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큰돈을 보태 '한국의 대표적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칭송받습니다. 최준 선생은 독립자금을 댄 탓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한 때 3만 석의 빚을 지기도 했었지요. 경주 최부자집은 만석지기였지만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손님 대접은 후하되 집안 내부 살림에는 매우 검소하였지요. 삼베옷을 삶아 옷 손질하던 시절 누덕누덕 하도 많이 기워입어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난 탓에 솥단지가 꽉 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많이 갖되 나눔의 철학을 실천한 분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우리네 살가운 인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