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월)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정약용, ‘조룡대 설화’ 부정했다

[부여문화통신]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3)

   
▲ 1900년대 조룡대 엽서
[그린경제/얼레빗=윤재환 기자]  부소산에는 사자루 말고 영일루(迎日樓)도 있다. 이곳에 올라 멀리 보면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보이는데, 원래는 영월루가 있어서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달를 맞이했던 것이라 한다. 현재의 누정 건물은 1871(고종 8) 당시 홍산군수이던 정몽화가 관아문으로 세운 것인데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이름도 영일루라 고쳐 부르고 있다.  

영일루가 있던 자리는 본래 영월대가 있던 곳으로, 가람 이병기와 육당 최남선의 기행문에만 해도 분명 달맞이대로 되어 있었는데, 해맞이대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영일루라는 현판 글씨는 부여군 홍산면 출신의 원곡 김기승(1909~2000)이 썼다. 누정 안에는 인빈출일(寅賓出日)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는데 서체가 주는 느낌이 역동적인데, 청양 사람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글씨다. 

부소산은 사실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쪽은 완만하고 북쪽은 가파른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높지는 않지만 성벽처럼 우뚝 막아서고, 그 아래 백마강이 해자처럼 두르고 있어 유사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부여의 진산이라 하기에 흠 잡을 데가 없다. 또한 백제 왕궁의 후원답게 산()이기보다 원()이라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운치 있는 산책길이 이리저리 이어져 있다. 

이밖에도 군사들에게 먹일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인 군창지(軍倉址)가 부소산의 가운데에 있고, 움집터인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도 발굴되어 있다. 백제 말기의 세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을 모신 삼충사(三忠祠)도 있고, 적군에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궁녀사(宮女祠)도 있다. 

백제탑의 저녁노을도, 구룡평야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도, 백마강에 조용히 잠긴 달빛도, 규암나루로 들어오는 돛단배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의 아지랑이도,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두견새도, 노을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구슬비도 부소산에 오르면 모두 볼 수 있다고 시인 신동엽은 말했다. 이른바 부여팔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부소산을 이 정도로 산책하고, 조금 다른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 1900년대의 낙화암. 부소산 마루에 사자루(1919년 세움)는 보이는데 낙화암 마루에는 백화정(1929년 세움)이 안 보인다.

   
▲ 1900년대의 고란사. 벚꽃이 활짝 핀 것을 보니 봄철인듯 싶은데, 멀리 백마강 건너편에는 조림된 미루나무가 한줄로 나란히 서있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자신의 시문집 여유당전서조룡때기(釣龍臺記)”를 적은 바 있다. 거기에서 정약용은 패망한 나라의 왜곡된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옛날 서울에서 지낼 때, 한 민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다. 황금 투구를 쓰고 무쇠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장수가 쇠줄 한 가닥을 잡고 물 가운데 바위에서 용()을 낚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용은 낚시에 걸려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로 머리를 든 채 앞발로 바위를 밀며 끌려 올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장수와 용은 서로 온힘을 쏟으며 혈전을 벌인다.

나는 물었다. “저것이 무슨 그림이오.” 

답이 왔다. “옛날에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백마강에 이르렀는데, 신룡(神龍)이 나타나 짙은 안개와 괴상한 바람을 일으켜 배를 탄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오. 소정방은 화가 나서 백마(白馬)를 미끼로 삼아 그 용을 낚아 죽여 버렸지요.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잦아져 비로소 백제를 정벌할 수 있었지요. 이 그림은 그 사연을 표현한 것이오.” 

나는 말했다. “참 해괴한 사연이오.” 

그해 가을 나는 금정(金井)에 있었다. 부여 현령 한원례(韓元禮)가 여러 차례의 글을 보내 백제의 고적을 구경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부여를 찾았고, 9월 보름에 고란사 아래에 배를 띄워 조룡대 위에 올랐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황당한 것을 좋아 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가에 바로 붙어 있다. 이 정도면 이미 부소산 기슭에 닿은 것이나 진배없다. 북을 힘으로 용과 싸울 필요가 없다. 조룡대의 위치로 보면 소정방의 군사는 이미 부소산성을 함락한 뒤라고 생각된다.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금강으로 올라왔다면 굳이 절벽이 있는 부소산 북쪽 백마강까지 올 까닭도 없다. 그 이전에 상륙할 쉬운 지점을 놔두고 조룡대가 있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라의 시조(始祖)가 탄생한 때는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일이다. 당시 기록된 내용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며, 백제가 망한 때는 당()나라 고종(高宗) 때다. 용을 낚시로 낚아 올렸다는 설()은 지극히 황당하다. 그러므로 한나라나 당나라 이전의 이야기들은 그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고려시대 이전의 일은 모두 불명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이 부여를 둘러보고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다. 고증이 안된 문헌을 배격하고, 실제로 쓸모가 있는 학문을 닦았던 실학파 학자였던 정약용으로서는 당연한 지적이었다.  


   
▲ 석벽(石壁) 홍춘경(홍春卿)의 "국파산하이석시" 탁본. 79×22cm, 홍춘경은 연산군 3년(1497)부터 명종 3년(1548 )사이에 활동했다. 글씨는 13세손 홍승순이 썼다.


국파산하이석시(國破山河異昔時)

독류강월기영휴(獨留江月幾盈虧)
낙화아반화유재(落花巖畔花猶在)
풍우당년부진취(風雨當年不盡吹)

나라가 망하니 강산도 옛날과 다르구나
홀로 강에 남은 달은 차고이지러짐이 그 몇 번이던가
낙화암 절벽의 꽃은 아직 남아 있으니
그 때의 비바람이 다 불지 않았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