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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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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룡대 설화의 허황함

[부여문화통신]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4)

[그린경제/얼레빗=윤재환 기자] 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황당한 것을 좋아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가에 바짝 붙어있다. 이 정도면 이미 부소산 기슭에 닿은 것이나 진배없다. 죽을힘으로 용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조룡대의 위치로 보면 소정방의 군사는 이미 부소산성을 함락한 뒤라고 생각된다.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금강으로 올랐다면 굳이 절벽이 있는 부소산 북쪽 백마강까지 올 까닭도 없다. 그 이전에 상륙할 쉬운 지점을 놔두고 조룡대가 있는 곳까지 거슬러 온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라 시조가 탄생한 때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일이다. 당시에 기록된 내용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며, 백제가 망한 시기는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다. 용을 낚시로 낚아 올렸다는 이야기는 지극히 황당하다. 그러므로 한나라나 당나라 이전의 이야기들은 그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고려시대 이전의 일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조룡대 ▲ 조룡대 글씨 정약용이 부여를 들러보고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다. 고증이 안 된 문헌을 배격하고 실제로 소용이 되는 학문을 닦았던 실학파였던 정약용으로서는 당연한 지적이었

정약용, ‘조룡대 설화’ 부정했다

[부여문화통신]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3)

▲ 1900년대 조룡대 엽서 [그린경제/얼레빗=윤재환 기자] 부소산에는 사자루 말고 영일루(迎日樓)도 있다. 이곳에 올라 멀리 보면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보이는데, 원래는 영월루가 있어서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달를 맞이했던 것이라 한다. 현재의 누정 건물은 1871년(고종 8) 당시 홍산군수이던 정몽화가 관아문으로 세운 것인데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이름도 영일루라 고쳐 부르고 있다. 영일루가 있던 자리는 본래 영월대가 있던 곳으로, 가람 이병기와 육당 최남선의 기행문에만 해도 분명 달맞이대로 되어 있었는데, 왜 해맞이대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영일루라는 현판 글씨는 부여군 홍산면 출신의 원곡 김기승(1909~2000)이 썼다. 누정 안에는 인빈출일(寅賓出日)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는데 서체가 주는 느낌이 역동적인데, 청양 사람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글씨다. 부소산은 사실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쪽은 완만하고 북쪽은 가파른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높지는 않지만 성벽처럼 우뚝 막아서고, 그 아래 백마강이 해자처럼 두르고 있어 유사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부여의 진산이라 하기에 흠 잡을 데가 없다. 또한 백제 왕궁의

소정방이 용을 낚은 조룡대

[부여문화통신]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2)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소산 산책은 여러 경로로 접근할 수 있다. 대개는 왕궁지로 알려진 정문으로 들어가 시작하지만, 거꾸로 구드레나루에서 황포돛대를 올린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배에서 내려 고란사로 올라가기 직전 눈여겨볼 것이 있는데 하찮은 바위 하나다. 당나라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하기 위해 부소산 기슭에 배를 대려고 했으나 물결이 거세어 도저히 댈 수가 없었다. 소정방은 꿈속에서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백제의 수호신인 용이 되어 심한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용을 잡으려면 백마를 미끼로 삼으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무왕이 평소 백마를 좋아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드디어 백마 미끼를 삼킨 용이 몸부림을 치자 소정방은 죽을힘을 다해 낚싯줄을 감아 채 용을 잡는다. 그 용을 낚은 바위를 낚을 조(釣) 자를 써서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지금껏 소정방의 발자국과 용과 씨름하던 낚싯줄 자국이 남아있다. 그래서 백강(白江) 아니 백마강(白馬江)이 탄생했다고 한다. 1988년 103살로 세상을 떠난 필자의 할머니는 조룡대 전설을 들려주실 때마다 당시 수심은 명주실 세 타래를 풀어야 할 만큼 깊었다고 한다

금성산은 부여를 바로 보게 한다(제1경)

<윤재환의 신부여팔경> ③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여를 찾는 대개의 사람들은 으레 부소산에 오른다. 아침 일찍 부소산에 올라 새벽안개가 덜 걷힌 백마강을 바라보며, 미처 알지 못하는 백제의 옛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저녁 부소산에 오르면 반월루(半月樓)에 올라 부여 읍내를 내려다본다. 아담하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들이 나그네의 시선을 나름대로 사로잡는다. 그러나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눈에 확 띄는 유적도 없고, 왕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왜소한 읍내 탓이다. ▲ 신부여팔경의 제1경인 금성산에 올라 바라본 2010년 부여 읍내 그래서일까. 가람 이병기 선생은 낙화암이란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부여 고도(古都)란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왕도의 위용은커녕 작은 시골 읍내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곳이 부여다. 그러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48년 자신의 출판사 동명사에서 펴낸 《조선의 고적》에서 부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적이라 하면 묵은 자취요, 꿈된 옛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쓸쓸하고 서럽고 한탄을 자아내게 생겼을 것은 물론이지만, 개개의 고적이 죄다 추창 적막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금새가 정해 있지 아니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