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량사 매월당, 고암 정병례, 돌, 2007 [한국문화신문 = 윤재환 기자] 부여는 백마강을 끼고 완만한 구릉들 사이에 있어 눈길을 쳐들고 올려다볼 만한 산이 없다. 그런데 40번 국도를 따라 보령 방면 방향으로 20여 km를 달리면 해발 575m 만수산을 만나게 된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 잡은 이 산의 기슭에 무량사가 앉아 있다. 대부분의 절은 속세와 떨어진 한적한 데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무량사는 다른 절의 한적함보다도 한결 아늑하다. 한창이던 시절 무량사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렸는데, 지금은 도솔암, 무진암, 북진암 등이 있다. 예로부터 고시준비를 이곳에서 하면 뜻을 이룬다고 해서 고시준비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무량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네댓 가지가 있으나 각각 차이가 있어 초창 시기나 창건주를 명확하게 밝히기가 어렵다. 하지만 범일(梵日, 810~889)이 창건했다는 기록은 일치한다. 범일은 당나라에서 수도를 하고 847년에 귀국한다. 범일은 귀국 뒤 상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사굴산문을 개산(開山)하여 40여 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스님이다. 그렇다면 무량사의 창건 시기는 9세기 말 이후로 봐야 하는 것이 무리가 없
[한국문화신문 = 윤재환 기자] 궁남지(宮南池)는 말 그대로 왕궁 남쪽에 조성된 연못이란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이곳은 미래방죽으로도 불렀다. 방죽의 원말은 방축(防築)인데, 물의 침범을 막기 위해 쌓은 둑을 가리킨다. 하지만 둑은 아니었고 농지와 모호하게 뒤섞인 습지연못이었다. 습지와 논이 혼재한 한켠에는 쓰레기더미가 쌓이기 시작했고, 일부는 택지로 변해갔다. 미래방죽 주위에는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빙 둘러 있었고, 그것을 그늘로 삼은 대나무 낚시꾼이 항상 있었다. 어린 필자는 낚시꾼들 사이를 비집고 물밤으로 불리는 마름 열매를 건져내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름은 물 위에 떠서 자란다. 뿌리를 물밑의 진흙 속에 내리며, 물 위까지 뻗어 있는 줄기 끝에 많은 잎들이 빽빽하게 달린다. 꽃은 7~8월에 피고, 흰색도 있고, 담홍색도 있다. 열매는 9~10월에 익는데 물에 잠긴다. 이것을 건져 삶아 말린 뒤 가루를 만들었다가 죽을 쑤어 먹으면 몸 안의 기운을 왕성하게 하고, 허약체질을 개선한다고 전한다. 그 마름 열매는 가끔 화석으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식물의 연대가 그만큼 오래 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 궁남지 포룡정,김억,다색목판,2007년
▲ 신부여팔경, 고암 정병례, 돌, 2007 [그린경제/얼레빗 = 윤재환 기자] 한국브리태니커회사로부터 독립한 뿌리깊은나무 출판사는 1978년 현대판 《택리지》라 할 《한국의 발견》(전11권)을 펴냈다. 그 시리즈 가운데 충청남도 편에 보면 1920년대에 찍은 국보 제9호 백제탑이 수록되어 있다. 탑 가까이에 초가집 여러 채도 함께 찍힌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그 초가집 가운데 탑과 가장 가까운 왼쪽 초가집이 필자의 선친이 태어난 곳이다. 선친은 백제탑 주변을 마당 겸 텃밭으로 삼아 생활했다. 할머니와 선친은 늘 백제탑 이야기를 어린 필자에게 들려주셨다. 필자 역시 백제탑 옆 백제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이웃한 부여중학교를 다녔다.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백제탑과 더불어 보낸 셈이다. 그러나 백제탑 알기를 돌로만 알았을 뿐 그 가치는 전혀 모른 채 자랐다. 홋날 백제탑이 국보 제9호이고, 부여 백제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무지를 지금도 다 가시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필자가 들은 그 탑의 이름은 평제탑(平濟塔)이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백제탑으로 불리었고, 그 뒤에는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부른다. 백제가 멸망
[그린경제/얼레빗=윤재환 기자] 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황당한 것을 좋아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가에 바짝 붙어있다. 이 정도면 이미 부소산 기슭에 닿은 것이나 진배없다. 죽을힘으로 용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조룡대의 위치로 보면 소정방의 군사는 이미 부소산성을 함락한 뒤라고 생각된다.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금강으로 올랐다면 굳이 절벽이 있는 부소산 북쪽 백마강까지 올 까닭도 없다. 그 이전에 상륙할 쉬운 지점을 놔두고 조룡대가 있는 곳까지 거슬러 온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라 시조가 탄생한 때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일이다. 당시에 기록된 내용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며, 백제가 망한 시기는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다. 용을 낚시로 낚아 올렸다는 이야기는 지극히 황당하다. 그러므로 한나라나 당나라 이전의 이야기들은 그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도 고려시대 이전의 일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조룡대 ▲ 조룡대 글씨 정약용이 부여를 들러보고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다. 고증이 안 된 문헌을 배격하고 실제로 소용이 되는 학문을 닦았던 실학파였던 정약용으로서는 당연한 지적이었
▲ 1900년대 조룡대 엽서 [그린경제/얼레빗=윤재환 기자] 부소산에는 사자루 말고 영일루(迎日樓)도 있다. 이곳에 올라 멀리 보면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보이는데, 원래는 영월루가 있어서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달를 맞이했던 것이라 한다. 현재의 누정 건물은 1871년(고종 8) 당시 홍산군수이던 정몽화가 관아문으로 세운 것인데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이름도 영일루라 고쳐 부르고 있다. 영일루가 있던 자리는 본래 영월대가 있던 곳으로, 가람 이병기와 육당 최남선의 기행문에만 해도 분명 달맞이대로 되어 있었는데, 왜 해맞이대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영일루라는 현판 글씨는 부여군 홍산면 출신의 원곡 김기승(1909~2000)이 썼다. 누정 안에는 인빈출일(寅賓出日)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는데 서체가 주는 느낌이 역동적인데, 청양 사람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글씨다. 부소산은 사실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쪽은 완만하고 북쪽은 가파른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높지는 않지만 성벽처럼 우뚝 막아서고, 그 아래 백마강이 해자처럼 두르고 있어 유사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부여의 진산이라 하기에 흠 잡을 데가 없다. 또한 백제 왕궁의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소산 산책은 여러 경로로 접근할 수 있다. 대개는 왕궁지로 알려진 정문으로 들어가 시작하지만, 거꾸로 구드레나루에서 황포돛대를 올린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배에서 내려 고란사로 올라가기 직전 눈여겨볼 것이 있는데 하찮은 바위 하나다. 당나라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하기 위해 부소산 기슭에 배를 대려고 했으나 물결이 거세어 도저히 댈 수가 없었다. 소정방은 꿈속에서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백제의 수호신인 용이 되어 심한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용을 잡으려면 백마를 미끼로 삼으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무왕이 평소 백마를 좋아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드디어 백마 미끼를 삼킨 용이 몸부림을 치자 소정방은 죽을힘을 다해 낚싯줄을 감아 채 용을 잡는다. 그 용을 낚은 바위를 낚을 조(釣) 자를 써서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지금껏 소정방의 발자국과 용과 씨름하던 낚싯줄 자국이 남아있다. 그래서 백강(白江) 아니 백마강(白馬江)이 탄생했다고 한다. 1988년 103살로 세상을 떠난 필자의 할머니는 조룡대 전설을 들려주실 때마다 당시 수심은 명주실 세 타래를 풀어야 할 만큼 깊었다고 한다
▲ <신부여팔경>, 고암 정병례, 돌, 2007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이다. 그 남쪽 기슭이 538년(성왕16) 이후 123년 동안 백제의 왕궁지였다. 그러니까 부소산은 진산 겸 빽제 왕궁의 후원 구실을 했던 것이다. 부소산의 북쪽 편을 감아 도는, 다시 말해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 앞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km 정도의 ‘금강’을 우리는 ‘백마강’이라 부르고 있다. 백제시대의 백마강은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 나라 안팎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교통로였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장애물, 곧 해자 역할도 했다. 또한 풍부한 농수원 구실도 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한결같이 강을 끼고 발달했던 것이다. 백제 역시 한강 유역인 하남 위례성에서 B.C. 18년에 온조가 개국한 이래 22대 문중왕 원년(475) 웅진(공주)의 금강변으로 잠시 도읍을 옮겼다가 26대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의 백마강변으로 천도하여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꽃은 활짝 피지 못한 채 제31대 의자왕 20년(660) 7월 18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국유사》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여를 찾는 대개의 사람들은 으레 부소산에 오른다. 아침 일찍 부소산에 올라 새벽안개가 덜 걷힌 백마강을 바라보며, 미처 알지 못하는 백제의 옛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저녁 부소산에 오르면 반월루(半月樓)에 올라 부여 읍내를 내려다본다. 아담하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들이 나그네의 시선을 나름대로 사로잡는다. 그러나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눈에 확 띄는 유적도 없고, 왕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왜소한 읍내 탓이다. ▲ 신부여팔경의 제1경인 금성산에 올라 바라본 2010년 부여 읍내 그래서일까. 가람 이병기 선생은 낙화암이란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부여 고도(古都)란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왕도의 위용은커녕 작은 시골 읍내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곳이 부여다. 그러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48년 자신의 출판사 동명사에서 펴낸 《조선의 고적》에서 부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적이라 하면 묵은 자취요, 꿈된 옛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쓸쓸하고 서럽고 한탄을 자아내게 생겼을 것은 물론이지만, 개개의 고적이 죄다 추창 적막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금새가 정해 있지 아니 합니다. -
[그림경제=윤재환 기자] 2002년7춸 30일 이른 아침.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앞으로 네명의 사람이 모였다. 화가 임옥상, 문화재전문감정위원 김영복, 건축설계사 최부득, 그리고 필자였다. 일행은 7시 20분에 부여를 향해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하늘을 몹시 찌푸렸고, 빗방울마저 오락가락했다. 10시 30분경 부영에 도착했고,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봉화대가 있는 금성산(121.2m)에 먼저 올랐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가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백제 26대 성왕은 538년 도읍을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남부여(南扶餘)로 불렀다. 당시 백제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북방의 부여 출신임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오늘의 부여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백제 왕족들의 성(姓)이 부여였다는 것도 관련이 있는 듯싶다. 사비성은 부소산을 휘감아 돌며 쌓아졌는데, 마치 그 모양이 반달을 닮아 반월성(半月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와곽성이 사비성인데, 우리는 이를 부여 나성이라 한다. 사비 백제가 시작된 538년을 전후하여 나성은 쌓아졌을 터인데, 옛 모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편집자 주 윤재환의 신 부여팔경을 시작하며 부여는 백제의 고도다. 그래서 누구나 부여를 찾고 부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윤재환의 신 부여팔경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부여의 새로운 정경이 펼쳐진다. 윤재환 선생의 깊고 넓은 신부여팔경 우리 모두 함께 해보자. ▲ 창산 신맹선, 부여관광안내도, 창산은 묵매를 즐겨 그리는 화가였는데, 이와 같은 관광안내도를 소상하게 그려 남겼다는 것은 그의 부여 사랑을 엿보게 하는 자료라 여겨진다. 한 지방의 특히 빼어난 여덟 군데 경치를 일컬어 흔히 팔경(八景)이라 부른다. 중국 북송(北宋, 960~1126) 때 학자이던 심괄(沈括, 1030~1093)이 지은 《몽계필담(夢溪筆淡)》에 송적(宋廸)이란 사람이 삽화를 그렸다. 그 삽화 가운데 여덟 군데의 풍경 그림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팔경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적의 대표작인 소상팔경(瀟湘八景)은 양자강 남쪽의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광 여덟 군데를 그린 것인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산시청람(山市靑嵐) 산시의 푸른 아지랑이 연사모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