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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차마고도 여행기

차마고도의 시작, 마방의 숨결 느껴보기

2-1. 둘째 날, 곤명의 박물관들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잠을 3시간 자는둥마는둥 하였는데 모닝콜의 전화벨은 사정없이 울린다. 아침을 먹고 운남역을 향하여 출발하여 가는데, 차가 잠시 서고 검사원이 올라온다. 혹시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을 태운 것은 아닌지, 또는 차에 법정비품은 비치하고 있는지 등을 검사하는 것이란다. 이들을 보니 예전에 검문하러 차에 올라오던 우리나라의 경찰관과 헌병이 연상된다. 독재정권 시절 이들이 차에 올라타 나를 쳐다보면 괜히 움츠려들곤 했지. 

   
▲ 곤명에서 대리까지 타고 간 버스 앞면 사진, 버스 유리창에 '차마고도'를 한자로 쓰여있다.

   
▲ 검문받기 위해 멈춘 사진

   
▲ 가는 도중에 차가 검사를 받기 위해 들른 곳,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휴게소 같은 곳에 차량 검사소가 있다.

가 다시 도로를 달린다. 그런데 운전사가 우리 일행이 운행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만 돌아다녀도 위험하다고 당장 앉으란다. 꽤나 안전에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러는 당신은? 운전사는 맞은편에서 차가 옴에도 마구 추월하여 우리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덕분에 맨 앞에 앉은 나는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 나중에 밥을 먹을 때에는 저절로 손이 떨릴 정도.  

보다 못한 외국 작가들이 가이드를 통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그때뿐이다. 심지어 운전사는 운전 중에 자기를 거슬리게 하는 파리가 운전대 앞에 앉자 얼른 옆에 있던 파리채를 들어 그 파리를 가격한다. ‘아하! 저 파리채가 왜 저기에 있나 했더니 저런 용도에 쓰는 것이었구먼.’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들르는데, 우리를 내려준 버스는 검사소로 들어간다. ‘운행 중에도 차 검사를 하나?’ 여행 중에 이렇게 버스가 검사소에 들르는 것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이어진다. 중국이 그렇게 차량 안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는 것을 예사로 하는 중국 운전사들의 운전습관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길을 가다보면 도로의 표지판에 천천히 가라고 晩行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런 난폭 운전사들은 晩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행(蠻行,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처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 만행(卍行)을 해야 하리라. 

교통 표지판에는 또 재미있는 것도 있다. ‘保持 車距앞차와 뒷차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라는 얘기인데, 이 한자를 우리식 한자말로 읽으니, 이거 영~~~ 그런데 안전거리 유지를 하지 않는 차들이 많다. 혹시 이들은 保持를 우리말 보지의 뜻으로 잘못 알고 앞차의 꽁지를 쫒아가는 것 아냐? 

운남역에 도착하니 배꼽시계는 점심시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곧바로 식당부터 들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행 이틀째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 이동만 하고 있지 본격적인 여정은 시작도 안 한 것이다. 나는 운남역이라고 하여 무슨 역인가 하였더니 지명 자체가 운남역이다. 옛날 차마고도를 오가는 마방들이 머물렀다 가는 곳이라 운남역이란 지명이 생겼다. 그렇지 우리나라 역삼동, 양재역도 그렇게 하여 생긴 지명이지. 퇴계원, 장호원, 이태원, 사리원 등도 예전에 여행자들이 하룻밤 자고 가던 원(숙박소)이 있던 곳이 아예 지명으로 고착된 것이고...

   
▲ 2차 대전 때 도로공사 할 때 사용하던 큰 롤러
 
   
▲ 2차 대전 당시 쓰였던 비행기 잔해

   
▲ 차마고도의 시작인 운남역 사진

점심을 먹고 식당 앞 공터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저쪽 한 구석에는 2차 대전 때 사용했음직한 비행기가 뼈대만 겨우 남아 녹슬고 있고, 한쪽에는 도로공사 할 때 사용하던 큰 롤러들이 흩어져 있다. 롤러들 앞에 서 있는 기념비에는 滇緬(Burma) 公路 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이제 안내원을 따라 차마고도 박물관으로 가는데, 안내원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조그만 도로 위에 멈춘다. 앞에는 절에 들어가는 일주문처럼 문이 서있고, 문 위에는 雲南驛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서는 양옆으로 집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고... 반대쪽으로는 들판 한가운데로 길은 멀리 남쪽을 향하여 가고 있다. 저 길로 계속 가면 버마란다. 19388월에 뚫은 길이다. 아하! 아까 식당 앞 공터에서 본 롤러들이 다 이때 길을 닦으면서 사용하던 것이로구나. 기념비도 이 길을 뚫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안내원은 지금 밭으로 변한 이곳이 당시에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한다. 그럼 아까 본 비행기 잔해도 이 비행장과 관련이 있겠네.  

우리는 운남역 문을 통과하여 집들이 늘어선 돌길로 들어간다. 안내원이 길 가운데에 움푹 파인 돌 하나를 가리킨다. 차마고도의 오랜 세월 동안 말이 밟고 다니면서 저렇게 돌이 파여진 것이란다. 세월의 힘은 저 단단한 돌도 저렇게 움푹 파이게 만들었구나. 茶馬古道 - 운남의 차()와 티베트의 말()의 교역로로 오랜 세월 내려오던 차마고도. 마방들은 오랜 세월 운남의 차를 말에 싣고 티베트 라싸까지 그 머나먼 험한 길을 걸었다. 그 험한 세월의 역사가 저 돌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고... 

차마고도는 차와 말만 교역하던 길은 아니다. 저 길을 따라 소금마을 엔징(鹽井) 여인들의 눈물이 어린 소금이 티베트로 향했고, 티베트의 라마교가 저 길을 따라 운남과 사천으로 들어왔다. 차마고도는 라싸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길은 라싸를 거쳐 네팔로 인도로 이어지고, 길은 계속하여 로마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 북쪽의 실크로드만 배웠지만, 이렇게 차마고도도 동서양의 문명을 이어주던 길이었다. 

   
▲ ‘發福地人財興旺’, ‘家居寶地千財旺’ 라고 써붙인 집 대문

길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은 우리나라 절에서 주련을 달아놓는 것같이 길게 글을 써놓았다. ‘發福地人財興旺’, ‘家居寶地千財旺등 대부분 복이 들어오고, 재물이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인들이 재물의 신으로도 모시고 있는 관운장 그림도 많이 있고, 이와 쌍으로 장비 그림도 있다. 관운장이 재물의 신이라고 하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중국인들은 장사에는 신의가 제일이기에 신의의 장군 관운장을 재물의 신으로 모신다는군. 한편 어떤 건물의 담벼락에는 崇尙科學 反對邪敎라고 쓴 표찰을 붙여놓았고, 닫힌 문 양옆으로는 敎育要面 向現代化 面向世界 面向未來라고 써놓았다. 학교인가? 아무튼 옛것을 떨쳐버리고 빨리 미래로, 세계로 향하자는 이들의 열망이 뿜어 나오는 것 같다. 

이 길이 버마까지 연결되었다면, 이 길은 2차 대전에도 주요한 도로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2차 대전 기념관도 있다. 우리는 차마박물관 들어가기 전에 2차대전 기념관부터 들러본다. 안에는 미얀마로 향하는 길을 닦던 사진들과 이곳 비행장 사진, 조종사들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백인 조종사들은 이 비행장에서 비행술을 가르치던 조종사들이다. 벽에는 그중 로버트 무니(Robert Mooney)라는 조종사에 대해 써놓고 있다. 

일본군이 이곳 비행장을 공습하러 왔을 때 무니는 재빨리 이륙하여 공중에서 일본기들과 교전을 벌여 일본기를 격추하였으나, 그 자신의 비행기도 일본기의 날개와 충돌하면서 비행기는 씨앙윤(Xiangyun)이라는 마을을 향하여 추락하게 되었단다. 무니가 얼른 탈출하면 자신은 살 수 있으나 비행기는 그대로 씨앙윤의 민가를 덮치게 된다. 그러자 무니는 탈출을 포기하고 비행기가 씨앙윤을 비켜나도록 조종하고는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였다. 중상을 입은 무니는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22살의 나이로 이역의 땅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하여 씨앙윤의 주민들은 무니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으나, 문화혁명 기간 중 이 기념비는 파괴되었다가 1992년에 다시 무니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무니 - 아름다운 청년이었구나. 그 아름다운 청년을 잊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파괴된 기념비를 다시 세운 씨앙윤의 주민들도 아름답고... 

   
▲ 2차대전 기념관 - 사진만 전시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

   
▲ 2차대전 기념관의 2차대전 전쟁시 어느 지역 모형

사실 일본은 이 버마공로 때문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중일전쟁 기간 중 중국은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고 버마공로를 통해 들어오는 물자를 가지고 전쟁을 치루며 일본을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 등 물자 보급에 압박을 가하자, 일본은 전쟁물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라도 인도차이나 진출이 필요하였다. 하여 일본은 1940년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그 다음해에 전격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버마공로를 장악하게 되면, 보급로를 끊긴 중국군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연합군이 중국으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이용한 것이 또한 차마고도다. 

2차 대전 기념관을 나와 그 앞의 차마고도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운남 마방 문화박물관’. 나는 박물관이라고 하여 요즘에 지어진 건물인줄 알았더니 그 옛날 마방들이 머물다 가던 여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아니 개조한 것도 아니고 그 옛날 건물 그대로에 그 당시 사용하던 마구 등을 전시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것이 당시 마방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다. 이 건물은 청나라 초기에 문을 열었던 마점(馬店)으로 마점 중에서는 당시의 모습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란다. 

   
▲ 마방의 모습

   
▲ 마방에서 절을 올리고 있는 나인드레곤의 예술가

둘러보다 보니 어느 단 위에 지폐가 3묶음으로 쌓여있다. 산의 신, 다리의 신, 길의 신 앞에 앞으로의 여정을 보호해달라며 기원을 하고 헌금을 한 것. 요즈음 헌금한 것은 아닐 테고 재현해놓은 것이겠지. , 다리, - 이 모두가 마방들이 앞으로 티베트로 넘어가기 위하여 거쳐야할 험한 곳이니 당연히 이곳의 신에게 빌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밖에도 박물관에는 먼 길을 온 마방들이 마구를 내려놓던 곳, 말의 목에 달려 딸랑딸랑소리를 내던 방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본 우리는 그 옛날 마방들이 쉬면서 차 한 잔 하던 방에 둘러앉아 우리 또한 보이차 한 잔 마시며 이곳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는다. 이제 모레면 우리도 그 옛날 마방들이 넘어가던 그 길의 일부를 따라서 걸어보겠지. 그때의 말도 한 번 끌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