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어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결과를 낳고는 조용히 끝났다. 우리 국민은 국회의원 300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123자리, 새누리당에 122자리, 국민의당에 38자리, 정의당에 6자리, 무소속에 11자리씩 나누어 제20대 국회를 만들었다. 이런 결과를 보고 가장 놀란 집단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겠고, 가장 놀란 사람은 대통령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섬겨야 마땅한 국민의 마음에는 눈과 귀를 막은 듯이 하더니 선거철이 다가오니까 국회를 손아귀에 넣어서 다음 대통령도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안간힘을 다하는 노릇이 나 같은 사람 눈에도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은 저들의 욕망을 모질게 꺾고, 저들과 다른 생각으로 정치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국회를 이끌어갈 힘을 맡겼다. 이들이 앞으로 국민의 마음에 얼마나 눈을 열고 귀를 기우릴 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우선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스무 달 쯤의 임기 동안 어떻게 새로운 국회와 손잡고 국민이 맡겨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떠날지 자못 궁금하다. 나는 정치를 모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스무 달 남짓 남은 대통령의 앞날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제넘은 생각을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위의 반대말은 아래이기도 하고 밑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라는 낱말이 반대말 둘을 거느릴 만큼 속살이 넓고 두터운 한편, 밑과 아래의 속뜻이 그만큼 가깝다는 말이다. 이처럼 두 낱말의 속뜻이 서로 가까운 탓에 요즘에는 밑과 아래의 뜻을 헷갈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국어사전에서도 헷갈린 풀이를 해 놓았다. 밑 : 나이, 정도, 지위, 직위 따위가 적거나 낮음. 과장은 부장보다 밑이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밑이다. 아래 : 신분, 연령, 지위, 정도 따위에서 어떠한 것보다 낮은 쪽.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이다. 위로는 회장에서, 아래로는 평사원까지. 《표준국어대사전》 밑과 아래가 뜻으로나 쓰임새로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다. 하기야 밑은 ~ 따위가 적거나 낮음이라 풀이하고, 아래는 ~ 따위에서 어떠한 것보다 낮은 쪽이라 풀이했으니 아주 같지는 않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 《표준국어대사전》의 '밑'과 '아래'의 풀이, 두 풀이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낮음과 낮은 쪽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우리가 어릴 적에는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다녔으나, 요즘은 유치원생에서 대학생까지 모두 책가방을 등에다 짊어지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책가방을 지고 다닌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들 메고 다닌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말뜻을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메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책가방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깨에만 맡기느냐 등에다 맡기고 어깨는 거들기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메다는 어깨에다 무엇을 걸치거나 올려놓는 노릇이다. 이때 무엇이란 장대나 통나무, 보따리나 보퉁이를 비롯하여 어깨에 얹혀 있을 만하면 가릴 것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한 쪽 어깨에만 맡겨야 메는 것이라 한다. 굳이 두 쪽 어깨에 맡겨도 메는 것일 수가 있지만, 그럴 적에는 한 쪽 어깨에 하나씩 따로 맡겨야 메었다고 할 수 있다. ▲ 어깨 한쪽에 걸치는 것 메다, 양 어깨에 걸치는 것 지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무엇이나 하나를 두 쪽 어깨에다 걸치면 그 무엇은 어쩔 수 없이 등허리 쪽에다 맡기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면 메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다는 본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토박이말은 우리 겨레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집이다. 우리 몸에는 우리 겨레의 유전 정보가 들어 있듯이, 토박이말에는 마음 정보가 들어 있다. 몸에 들어 있는 유전 정보는 쉽사리 망가지지 않으나, 말에 들어 있는 마음 정보는 흔들리는 세상에 맡겨 두면 단박에 망가진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무섭게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토박이말을 지키고 가꾸고 가르치지 못했다. 흔들리는 세상을 타고 일본말이 밀려와 짓밟고 미국말이 들어와 휘저어 뒤죽박죽이 되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오며 갈고닦아 마련한 겨레의 마음 정보를 온통 망가뜨린 셈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네 마음, 우리네 느낌과 생각과 뜻과 얼은 토박이말과 함께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토박이말 무섭다와 두렵다의 쓰임새도 그런 보기의 하나다. 이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모습도 속살도 서로 다른 낱말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이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가려서 쓸 수 있는가? 무섭다 : 어떤 대상에 대하여 두려운 느낌이 있고 마음이 불안하다. 두렵다 :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말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이라는 손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말이 흐릿하면 세상도 흐릿하게 보인다.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즈믄(천)이면 세상도 즈믄을 받아들이지만, 사람처럼 손이 둘뿐이면 세상도 둘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에서 중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얼마든지 끌어다 써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토박이말로는 눈과 손이 모자라서 지난날 중국 한자말로 눈과 손을 늘렸다고 여긴다. 그 덕분에 이름씨 낱말이 얼마나 넉넉하게 되었는지는 국어사전을 펼쳐 보면 알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참말이 아니고 옳은말도 아니다. 산은 마치 토박이말처럼 쓰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끌어다 쓰기 전에는 우리에게 산을 뜻하는 이름씨 낱말이 없었을까? 이것이 들어와서 비로소 산을 뜻하는 낱말이 생겨나 우리가 산을 처음 바라보고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사실은 거꾸로다. 산 하나가 들어와서 이미 있던 토박이 이름씨 낱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갓과 재가 모두 산에게 잡아먹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8년 전에 경남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가운데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 생태 관광지로 첫손 꼽힌 데가 바로 창녕의 우포늪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는 창원의 주남저수지도 거기에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관광지의 이름이 하나는 우리 토박이말 우포늪으로 람사르 정신에 잘 어우러지지만, 다른 하나는 주남저수지라는 한자말이어서 아쉽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주남저수지는 아무래도 일제 때에 바꾸어 쓴 이름일 터이고 본디는 틀림없이 주남못이었을 것이다. 못은 쓸모 있을 적에 쓰려고 사람이 땅을 파고 둑을 쌓아서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못에 가두어 두는 물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는 것이라 논보다 높은 산골짜기를 막아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못은 거의 벼농사에 쓰자고 물을 가두어 두지만, 바닥의 흙이 좋으면 연을 길러서 꽃도 보고 뿌리를 캐서 돈을 벌자고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연을 키우려고 만든 못을 연못이라 부른다. 그리고 연못은 집 안에 뜰을 꾸미느라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뜰 안의 연못에 키우는 연은 꽃을 보자는 것일 뿐 뿌리를 팔아서 돈을 벌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말꽃’은 ‘문학’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토박이말이지만 예로부터 써 오던 것이 아니라 요즘 새로 나타난 말이다. ‘문학(文學)’은 본디 ‘글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공자님이 처음 썼다고 하는 중국말인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뜻으로 ‘문학’이란 낱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문학’은 놀이(희곡), 노래(시), 이야기(소설) 같은 것을 싸잡아 서양 사람들이 ‘리터러처(literature)’라고 하는 그것이다.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문학’이라 뒤쳐 쓰니까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그러나 놀이, 노래, 이야기는 이른바 ‘말의 예술’이므로, 중국말이었든 일본말이었든 글의 학문을 뜻하는 ‘문학’이라는 말로는 그것들을 마땅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말의 예술인 놀이, 노래, 이야기는 입말, 글말, 전자말을 두루 싸잡아야 하는데, 글말만을 뜻하는 ‘문학’이라 부르면 입말과 전자말로 즐기는 예술은 싸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중국 한자말 ‘문학’과 우리가 싸잡아 담으려는 뜻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데, 언제까지 우리가 ‘문학’이라는 남의 말을 빌려다 써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가슴에 품고 마땅한 낱말을 오래 찾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지난 세기 동안에 우리네 집의 모습과 쓰임새가 크게 달라져 말들 또한 뜻과 쓰임새 모두 많이 달라졌다. 지난날 우리네 집은 울(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담 대신 경계를 삼은 울타리)이나 담(집이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기 위하여 흙, 돌,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으로 둘러싸인 집터 위에 저마다 몫이 다른 쓰임새로 여러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다. 방과 마루와 부엌을 중심으로 하는 집채를 비롯하여, 마당과 뜰과 남새밭(채소밭) 따위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우리네 집터를 채운 것이다. 집의 노른자위는 물론 위채, 아래채, 사랑채로 나누어지는 삶의 보금자리인 집채다. 남새밭은 보금자리인 집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철따라 반찬거리 남새(채소)를 길러 내는 먹거리의 터전이었다. 마당은 집에서 집채나 남새밭에 못지않게 종요로운(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매우 긴요한) 자리다. 남새밭이 없는 집은 있을 수 있어도 마당이 없는 집은 있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종요롭다. 살림이 넉넉하고 집터가 넓으면 앞마당, 뒷마당, 바깥마당까지 갖춘 집들도 적지 않았다. 마당은 한마디로 집 안의 일터며 놀이터다. 밤이 오거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우리말에서는 풀이말을 으뜸으로 삼아 종요롭게 쓴다. 말의 뿌리와 뼈대 노릇을 하는 풀이말이 맨 뒤에 자리 잡고 앉아서 앞서 나온 여러 말을 다스리고 거느린다. 그러므로 맨 나중에 나오는 풀이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앞에 나온 여러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헛다리를 짚는 수가 적지 않다. 인사말을 보더라도 서유럽 사람들은 좋은 아침!, 좋은 저녁!같이 이름씨로 그만이고, 이웃 일본 사람들은 오늘 낮은?, 오늘 밤은?같이 풀이말을 잘라 버리고 쓰지만, 우리말은 반드시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같이 풀이말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이름씨 낱말은 움직씨나 그림씨 같은 풀이말에서 탈바꿈해 나온 것이 많다. 마개니 덮개니 뚜껑이니 하는 낱말도 모두 풀이말로 쓰이는 움직씨에서 탈바꿈한 이름씨다. 마개는 막다라는 움직씨의 줄기 막에 애가 붙어 이름씨 낱말이 되었고, 덮개는 덮다라는 움직씨의 줄기 덮에 개가 붙어 이름씨 낱말이 되었다. 이럴 적에 애와 개는 다 같이 ~에 쓰는 무엇이라는 뜻의 이름꼴 씨끝이다. 그래서 마개는 막는 데에 쓰는 무엇이고, 덮개는 덮는 데에 쓰는 무엇이다. 놀다에 애가 붙어 이루어진 노래는 노는 데에 쓰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광복 뒤로 얼마 동안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달려라! 달려라! 우리 백군 달려라! 하는 응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을 지나고 언제부터인가부터, 그것이 뛰어라! 뛰어라! 우리 백군 뛰어라!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온 나라 젊은이가 너나없이 뛰다와 달리다를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아예 두 낱말의 뜻이 본디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게 되어 버린 듯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국어사전들이 이들 두 낱말의 본디 뜻을 그런대로 밝혀 놓았다는 사실이다. 국어사전들은 뛰다를 있던 자리로부터 몸을 높이 솟구쳐 오르다. 몸이 솟구쳐 오르다.라고 풀이해 놓았고, 달리다를 닫다의 사동사. 달음질쳐 빨리 가거나 오다. 빨리 가게 하다.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두 낱말의 뜻이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달리다를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서 달리다와 뛰다가 서로 헷갈릴 빌미를 남겨 두었다. ▲ 뛰다와 달리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뛰다는 본디 제자리에서 몸을 솟구쳐 오르는 것이고, 달리다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