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내나무
삼짇날
어제는 한식이었습니다. 임금이 “한식(寒食)은 찬밥을 먹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가. 한식에는 불을 쓰면 안 되는가.” 하니,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옛 시에 이르기를, ‘푸른 연기 흩어져 오후 집으로 들어가네.’ 하였사오니, 이는 반드시 불을 내려주는 걸 기다려서 불을 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3년(1431) 2월 26일 자 기록입니다. ≪동국세시기≫에는 “청명(淸明)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인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불씨를 꺼트리면 안되는 예전에는 이렇게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임을 느꼈습니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이쁜 손녀 세상 나온 날 / 할배는 뒤란에 오동나무 심었다 / 곱게 키워 / 시집보내던 날 / 아버지는 / 오동나무 장 만들고 / 할매와 어머니는 / 서리서리 고운 꿈 실어 /담아 보냈다.” 위는 이고야 시인의 라는 시입니다. 청명 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시집갈 때 농짝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는데 이를 “내 나무”라고 부릅니다. 또 연정(戀情)을 품은 아가씨가 있으면 그 아가씨의 '내 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식목일도 따지고 보면 예부터 나무심기 좋은 절기를 따르는 셈이지요. 청명은 동지로부터 100일 되는 날로 한식 때와 같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기도 합니다. 청명 때가 되면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논 밭둑을 손질하는 가래질을 품앗이로 합니다. 청명(淸明)과 한식(寒食)은 겹치거나 하루 차이여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땅에 물이 촉촉하게 올라오는 청명엔 나무심기 좋은 때인데 우리 겨레가 즐겨 부르던 나무타령 민요를 보면 힘든 나무심기도 즐겁게 했을 것만 같습니다. ‘나무
오늘은 음력 3월 3일 삼월 삼짇날로 설날, 단오, 칠석, 중양절처럼 양수(陽數)가 겹치는 좋은 날입니다.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지요. 또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해 상을 당하며 노랑나비를 보면 행운이 온다고 합니다. 이날 전해오는 놀이로 사내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고, 여자아이들은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깁니다. 이날 선비들은 정원의 곡수(曲水, 구부러져서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곡수연이란 운치 있는 놀이를 즐겼습니다. 또 삼짇날에는 “제비맞이”라는 풍속도 있는데 봄에 제비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제비에게 절을 세 번 하고 왼손으로 옷고름을 풀었다가 다시 여미면 여름에 더위가 들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날 시절음식으로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로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드는 ‘화전(花煎)’이 있으며, 녹두가루에 붉은색 물
“쑥쑥 새순 돋는 봄날 / 명자야 명자야 부르면 /시골티 물씬 나는 명자가 / 달려나올 것 같다 / (중략) 사랑도 명자꽃 같은 것이리라 / 흔해 빠진 이름으로 다가왔다가 /가슴에 붉은 멍울로 / 이별을 남기는 것이리라 / 명자야 명자야 / 눈물 같은 것 버리고 / 촌스러운 우리끼리 바라보며 / 그렇게 한 세상 사랑하자” - 명자꽃 만나면(목필균) “명자”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꽃. 그러나 명자꽃은 작지만 화사한 아름다움으로 볼수록 신비한 매력이 숨겨진 꽃입니다. 4~5월에 피는 들꽃이지만 관상용으로도 많이 기릅니다. 한방에서는 목과(木瓜)라 하여 한약재로 쓰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처자화, 당명자나무, 산당화라고도 부릅니다. 시골 한적한 곳을 지나다 문득 발견한 붉은 꽃. 묘한 아름다움에 끌려 한참을 들여다보지만 처음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지요. 집에 와서 식물도감을 들여다 본 뒤에야 이 꽃에 “명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명자”라는 이름을 촌스럽다고 합니다. “촌스럽다”는 국어사전에서 “어울린 맛과 세련됨이 없이 어수룩한 데가 있다.”라고 풀이합니다. 하지만, 촌스러운 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촌에서 자라고 아직도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어떻게 치러졌을까요? 여기 그 자세한 내용이 담긴 그림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한시각의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가 그것인데 세로 57.9cm, 가로가 674cm로 아주 큽니다. 한시각은 조선 중기의 화가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대나무 그림 2폭을 그리기도 했고, 송시열의 초상화도 그렸다고 전해지지요. 는 화원화가인 한시각(韓時覺)이 1664년(현종 5년) 함경도 길주목에서 있었던 무과 과거 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이 그림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 곧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는데 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조감법(鳥瞰法)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이 그림은 드물게도 무과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지요. 문과시험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은 흔하지만 무과시험 장면을 담은 그림은 아주 드뭅니다. 더구나 북새선은도는 무과시험장 주변에 휘날리는 군기와 천막들, 활 쏘는 모습, 표적의 모양 등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어 역사적 자료 가치가 특별히 더 높습니다. 또 이 그림은 기록화의 특징이 잘
누구나 알다시피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바다를 굳게 지켜 나라를 구했습니다. 따라서 그를 우리는 성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무신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기만 해서 연전연승 싸움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그가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데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입니다. 이순신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중요한 부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바다 구석구석의 소용돌이치는 곳이라든지, 암초 등에 대해 백성들에게 들어서 소상히 알게 되었으며, 또 그것을 몸소 나가서 살펴보기도 했습니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5.1) 과 그 일가가 입었던 옷 그리고 꾸미개(장신구)들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영친왕 일가의 복식은 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991년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으로부터 반환받았습니다. 이 유물들은 200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총 333점이 지정되었는데 단일 지정문화재로서는 가장 많은 것입니다. 바로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유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이 유물의 내용은 임금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를 비롯하여 익선관(翼善冠)과 옥대, 목화와 왕비의 예복인 적의(翟衣) 등과 각종 비녀 꾸미개, 영친왕의 첫 아들인 이진의 돌옷을 포함한 옷으로 매우 귀한 것들입니다. 이 유물은 1957년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방자 여사가 일본에 30만 엔을 받고 넘긴 것들로 친필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얼마나 어려웠으면 귀한 것들을 헐값에 넘겨야했는지 황족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험난한 삶을 살다간 영친왕 일가에 연민의 정이 갑니다.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옷마저 남의 손 그것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