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암이 일찍이 선중 씨 집에 칠실파려안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취하여 화상을 그리게 했다. 공은 뜰에 놓은 의자에 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털끝 하나만 움직여도 초상을 그릴 길이 없는데,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굳은 채 오래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현대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바늘구멍상자)를 ‘칠실파려안’이라 이름 붙이고 연구했던 때로 봅니다. 여기에서 ‘칠실(漆室)'은‘매우 캄캄한 방', ‘파려'는 '유리', '안(眼)'은 '보다'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렌즈를 통해서 본다'라는 뜻인데 이 기구는 바늘구멍상자의 유리에 비친 화상에 종이를 대고 그린 것으로 복암 이기양이 선구인 셈입니다. 또 우리나라에 사진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83년 황철이란 사람이 자신의 서울 집 사랑채를 고쳐 촬영국을 만들고 초상사진과 기록사진을 찍었으며, 같은 해 김용원이란 사람도 일본인 사진
옛 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방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되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날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 뒷간 모형(청암민속박물관)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을 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앞에 음
나물은 푸성귀(채소)나 산나물 ·들나물 ·뿌리 등을 데친 다음 갖은양념에 무쳐서 만든 반찬을 말하지요. 그 종류를 들어보면 애호박나물·오이나물·도라지나물·숙주나물·시금치·쑥갓·미나리·고춧잎·깻잎·무나물·콩나물·고사리·고비·취나물·시래기나물·가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끄는 이 나물이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백성이 끼니를 때우는 구황식품이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가장 태평성대였다는 세종 때인 1444년 4월 23일 자 세종실록을 보면 병조 판서 정연(鄭淵)이 임금께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곧 청안(淸安, 현재 충북 괴산 부근) 지방에 갔을 때 남녀 30여 명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물만 먹은 얼굴빛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나물을 캐는 백성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며 백성들의 배고픔을 걱정하는 내용이지요. “다북쑥을 캐네 / 다북쑥을 캐네 /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를 넘어가네 / 푸른 치마 붉은 머리 허리 굽혀 쑥을 캐네 / 다북쑥을 캐어 무얼 하나 눈물만 쏟아지네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이며, 초혜(草鞋)라고도 합니다. 또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이 초리가 바로 짚신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개탄합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그 이전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습니다. 짚신은 원래 처음 삼을 때는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똑 같이 만듭니다. 다만 오래 신으면서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지는 것이지요. 또한 조선 초기엔 양반과 평민 사이에서 옷은 분명이 구분이 되었지만 짚신은 양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는 흔히 UCLA로 알려진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가 있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 50개 주와 100개의 다른 나라 출신들이 모여 있는 연구 중심 대학으로 미국대학 순위에서 상위에 올라 있지요. 이 학교에 한국음악과가 있는데, 이 대학 민족음악대학 안에서 매 학기당 250여 명이 수강하는 가장 인기 있는 과로 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시작한 이 한국음악과는 지난 2004년 UCLA 대학 당국으로부터 주정부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이유로 없앨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한국음악과 김동석 교수와 한국전통음악학회(회장 단국대 서한범 교수)는 폐과를 막고자 온 힘을 기울여 왔지요. 이 대학의 한국음악과 보존을 위해 학술강연과 심포지엄, 한국음악 공연을 지난 2001년부터 지속해왔는데 올 2월 11일로 벌써 10번째를 맞았습니다. 이 행사에 드는 경비는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약간의 정부 지원금과 기업 후원금으로 어렵사리 이어오고 있
오늘은 24절기의 세 번째 경칩입니다. 경칩은 일어나다는 ‘경(驚)’과 겨울잠 자는 벌레라는 뜻의 칩(蟄)이 어울린 말로 겨울잠 자는 벌레나 동물이 깨어나 꿈틀거린다는 뜻입니다. 만물이 움트는 이때 옛부터 젊은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은행씨앗을 선물로 주고받고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수나무 암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졌습니다. 그래서 경칩은 토종 연인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뒤의 ‘돼지날’ (해일, 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하도록 했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이기도 했지요. ≪성종실록≫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고 했는데 우수와 경칩은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때입니다. 더러 민간에서는 경칩에 개구리 알이나 도룡뇽 알을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였으나 어린 생명을 그르치는 지나친 몸보신은
“언제부터 걸려 있었나 잿간 흙벽에 외로이 매달린 작은 꼴망태기 하나 / 그 옛날 낫질 솜씨 뽐내셨을 할아버지의 거친 숨결이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 찐득찐득 배어들어 누렇게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무지겟짐 세워 놓고 떡갈잎 물주걱 만들어 / 시원하게 목축이다 흘리신 바윗골 약수랑 싱그러운 들꽃 향기랑 / 소릇이 배어들어 바작바작 삭어버린 꼴망태기 하나” 위 노래는 최병엽 작사, 한동찬 작곡의 동요 의 일부입니다. “망태기”는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써왔던 것인데 새끼 등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로 씨앗 따위를 담아 매달아 두기도 했으며 망탁·망태라고도 하고, 지역에 따라 구럭·깔망태·망탱이라고도 하지요.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양끝에 길게 고리를 달기도 했습니다. 망태기는 쓰임새와 모양에 따라 이름도 달라집니다. 말과 소에 먹이는 풀을 담는 꼴망태가 있고, 장기짝을 넣어 두는 조그마한 망태기 장기망태기도 있습니다. 망태기와는 모양이나 쓰임새가 다른 “삼태기”도 있는데 쓰레기·거름·흙·곡식 등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지요. 그밖에 또한 망태기와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쓰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습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 이중병풍, 제비추리, 구름, 난초, 나비, 호리병, 박쥐 따위로 불렀습니다. 지금은 고가구를 보기 어렵지만 아름다운 경첩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기후는 매우 온화하여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일 십오 원(대한 돈으로 오십칠 원 가량)씩이고 일하는 시간은 매일 십시간 동안이며 일요일에는 휴식함.” 이는 1903년 온 나라에 나붙은 하와이 이민 모집공고입니다. 하와이 설탕 재배업자들은 대한제국과 이민협정을 맺었지요. 이에 따라 그해 12월 제물포항에서 일본우편선을 타고 맨 처음 하와이로 이민 간 사람은 102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간 하와이는 꿈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뙤약볕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백인 감독이 휘두르는 채찍 아래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이민 3년 만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한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월급의 절반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낼 정도로 누구보다도 독립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특히 ‘사진 신부’로 이민 온 여성들은 1913년 대한부인회를 세우고 삯바느질과 양복수선을 하며 모은 돈으로 활동비와 독립 자금을 마련했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경복궁 안에는 고종이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의지를 보여주려고 세운 건청궁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청궁(고종 10년, 1873)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 당함으로써 한이 서린 곳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건청궁에 다시 일본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한국의 파워 스폿'이라는 관광상품을 선보였습니다. 파워 스폿(Power Spot)이란 기(氣)가 충만해 영험이 있는 장소로, 이런 곳에 흐르는 기를 받으면 스트레스가 치유되고 안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최근 일본의 20~30대 여성들 사이에 '스피리추얼(Spiritual·영적) 파워 스폿' 여행 붐이 일자 관광공사가 이를 도입한 상품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관광공사가 선정한 풍수지리적 명승지에는 한·일 역사에서 '한 서린 과거'를 지닌 곳이 들어 있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른바 풍수 명승지를 보면 일제가 궁궐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었던 창경궁도 들어 있으며,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노골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던 건청궁도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