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영국 런던 ‘웸블리’ 접수한 BTS”, “BTS가 ‘에오∼’ 하자 런던이 열광했다”, “‘에~오’ BTS 런던 웸블리를 호령하다” 등 요즘 뉴스에는 방탄소년단의 영국 웸블리 공연 소식으로 굉장합니다. 특히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6만 명이 몰려든 가운데 한국어로 떼창을 불러 감동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일부 인터넷 신문은 기사 제목을 “영 웸블리 물들인 한글떼창”, “방탄소년단, 英 웸블리서 외친 아미…6만 관객의 한글떼창”이라고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어 떼창이 아닌 한글 떼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글이름’을 강연한다는 신문광고가 난 것은 물론 지난달에는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단체 회원들이 ‘한글이름 독립 선언 기자회견’을 했다는 기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론 뉴스의 제목을 보면 “국내 상장사 유일 순 한글 이름 ‘빙그레’의 ‘한글 글꼴’ 배포”, “'어서와 한국은' 한글 이름의 칠레 자매들이 떴다!"처럼 어이없이 ‘한글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면 ‘한글’로 쓴 이름은 있을지 몰라도 ‘한글이름’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 대통령 ‘Trump’를 한글로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왜변(倭變)이 일어났다고 들음에 미쳐서 곽재우는 그 당시 별서(別墅)에 있었는데, 곧 크게 통곡하고는 스스로 별서를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재물을 모두 흩어서 무뢰배 1백여 명을 모아 왜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먼저 의령(宜寧)에 있는 왜적을 치고 다음으로 포위당한 진주성(晉州城)을 구원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하였다. (중간 줄임) 어느 날 홀연히 바람과 우레가 그의 방을 감싸더니 곽재우가 그 방안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는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1617) 4월 27일(양력 5월 31일) 기록으로 한성부 좌윤을 지낸 곽재우 죽음의 기록입니다. 곽재우(郭再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시골 선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왜군이 부산포를 점령했다는 기별이 당도하자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들을 이끌고 왜군을 크게 물리쳐서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을 막았지요. 이후에도 거름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낙동강을 이용하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과 창녕과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보면 곽재우는 싸울 때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최고상)을 받아 나라 안 언론들은 관련된 뉴스를 쏟아내기에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칸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것과 함께 여러 가지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장에서 주연배우 송강호 씨에게 프러포즈하듯 무릎을 꿇고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건네는 자세를 취하며, "송강호라는 위대한 배우가 없었다면 내 영화는 한 장면도 찍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제작진에 주 52시간 근무를 보장했는데 기준법을 제대로 준수하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찍을 수 있다는 모범을 보였다는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또 금의환향한 봉준호 감독이 ‘한국에 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충무김밥을 먹고 싶다.”고 해 그의 소탈한 인간성을 드러냈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출국 전 제작 발표회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은 워낙 한국적인 영화다. 해외에서 100% 이 영화를 이해하진 못할 거라는 생각한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지난 21일 프랑스 칸 뤼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진주 국립진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858호 <중완구(中碗口)>란 화포 하나가 있습니다. 이 중완구 약실 표면에는 오목새김(음각)으로 ‘萬曆十八年九月 日營 鑄成震天雷○里重八十五斤 高州浦匠 李勿金(만력18년9월 일영 주성진천뢰여리중85근 고주포장 이물금)’이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완구는 1590년 9월에 고주포영에서 화포장 이물금(李勿金)이 주조한 것으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완구에서 쓰는 포탄)을 발사하면 1리(약 0.4km)를 갈 수 있고, 무게는 85근(약 51kg)정도라고 합니다.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부르는데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ㆍ단석(團石, 포탄의 하나) 등의 탄환을 발사하는 화포의 하나입니다. 완구는 크게 완(碗), 격목통(激木筒), 약통(藥筒)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완은 발사물 곧 큰 돌이나 쇠공 등 포탄을 올려놓는 곳으로 그릇 모양을 하고 있지요. 또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점화선을 끼우는 점화구멍을 2개 가지고 있습니다. 약통과 완 사이에는 격목통이 있는데 이곳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이야 어디를 가도 머물고 잠을 잘 수 있는 숙박시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조선시대만 해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역시 잠을 잘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나라 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역마와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 역(驛)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을 위한 퇴계원, 혜음원, 인덕원, 다락원 따위 원(院)은 땔나무나 마실 물 밖에 줄 수 없는 열악한 곳이었지요. 침구는 물론 장과 소금에 절여 말린 청어도 갖고 다녀야 했고, 심지어 가지고 간 쌀로 밥도 지었으며, 불을 밝히기 위한 관솔도 갖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8세기 무렵이 되면 교통 요충지 큰길가나 나루터 주변, 산기슭에 주막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 말먹이만을 해결할 수 있었고, 오직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은 채 대개는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뒤엉켜 자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주막에 드는 사람들의 짐보따리에는 옷은 물론 세면도구, 비상식량에 요와 이불까지 함께 들어 있을 정도였지요. 조선 시대의 주막(酒幕)은 ‘술막’이라고도 했는데, 잠자리는 제공하지 않고 식사만 내놓는 간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落盡園花春已去(낙진원화춘이거) 뜰에 꽃이 다 떨어졌으니 봄은 이미 가 버렸고 幽人情抱向誰開(유인정포향수개) 은자의 마음을 누구를 향하여 열어야 하나? 天工故作深情態(천공고작심정태) 하지만 조물주는 일부러 깊은 모습을 만드니 滿樹桃紅漫浪哉(만수도홍만랑재) 나무 가득 붉은 복사꽃이 흐드러져 있구나! 이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용개(申用漑, 1463년 ~ 1519)의 <만홍도(晩紅桃)>란 시로 늦봄에 핀 복숭아꽃을 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뜰에 꽃이 다 떨어져 봄은 이미 가 버렸으니, 숨어 사는 사람의 회포는 누구를 향해 열어야 할까요? 다만 다행인 것은 늦봄에 조물주가 일부러 붉은 복사꽃을 흐드러지게 피게 한 것입니다. 봄이 가버렸지만 복사꽃이 바람에도 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신용개는 대제학,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찬성까지 지냈으며,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던 인물입니다. 범접하지 못할 인품으로 당시 선비들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성종은 신용개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저서로는 《이요정집(二樂亭集)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두 줄의 미학으로 황홀한 해금 연주가 이유라가 ㈜오감앤터테인먼트를 통해서 미니음반 “THE SONG OF SONGS”을 내놨다. 이유라는 지난 2015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김세종제 춘향가로 듣는 이유라의 해금산조” 공연을 한 바 있다. 공연에서 이유라는 해금으로 김세종제 춘향가를 통한 현재적 산조를 풀어놓겠다고 했다. 또 “공연이 해금산조의 새로운 기반이 되어 예술적 표현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는 동시에 그 가치가 재조명 될 수 있길 소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산조를 전공한 연주자이면서 정악까지 공부한 집념의 국악인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늘 새로움을 시도한다. 그런 그의 마음이 이번 미니음반을 만들어냈을까? 첫곡은 ‘하얀 춤’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웃고 손잡고 걷는 길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길에서 하얀 춤을 추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얀꽃이 흘날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걷는 길에 미소짓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은 곡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에 대한 행복감을 그린 곡이다. 이어서 ‘봄봄’은 아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 중국지사장인 석화 선생은 중국조선족대표시인이다. 최근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발표자로 입국하여 서울에 온 그는 한국 및 세계한글문학무대에 중국조선족문학을 널리 알리기에 하루하루 바쁘다. 석화 시인은 5월 17일 입국하는 날 서울 대림동의 중한문학교류협회 (회장 리동렬)를 찾아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열심히 창작활동을 진행하는 동포시인, 작가들을 만나보고 중국에서 펴낸 "문아총서 제2권 • 깊은 산 속의 정적"을 전달하였다. 이 책에는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한문화교류협회 회원들의 시와 수필 등 수십 편 작품이 실려 있어 동포작가들에게 큰 기쁨과 격려가 되었다. 이어 21일에는 수원 소재 아주대학에서 펼쳐진 이주문화연구센터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중국조선족문학에 나타난 이주담론"이란 주제로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연구논문 발표에서 "조선족 , 연변 그리고 연작시 <연변>"을 화두로 충분한 논거와 다양한 사실로 중국조선족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 석화 시인의 강연은 참가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왔는데 이번 학술대회를 주관한 아주대 송현호 교수는 "우리 대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德溫, 1922~1844)과 그 후손들이 남긴 한글 유산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기획 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덕온공주의 친필 《ᄌᆞ경뎐긔》 외에도 눈여겨 볼만한 자료가 많다. 특히 덕온공주의 양자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던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한글로 쓴 중국 역사와 윤용구 유품 등은 첫 공개되는 자료일 뿐 아니라, 여성과 소통하고자 했던 윤용구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 국어학뿐 아니라 서예학, 역사학,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하다. 새롭게 조명해야 할 조선 말~근대기 사대부 윤용구 덕온공주와 윤의선(尹宜善, 1823-1887)의 양자 윤용구는 1871년 19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요직을 두루 거쳐, 3조(예조, 공조, 이조) 판서까지 지냈으며, 왕실의 종친으로 어린 시절부터 궁중에 드나들며 고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을미사변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숨어 지냈으며 한일병합조약 뒤 일본 정부에서 수여하는 작위를 거절했다. 윤용구는 궁중의 여러 의례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공재 윤두서가 그린 윤씨가보(尹氏家寶) 가운데 “짚신삼기”라는 그림을 보면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서 편히 앉아 짚신을 만드는 한 남자가 보입니다. 맨상투에 수염이 더부룩한 모습의 이 사람은 정강이를 다 드러내고 앉은 채 두 발가락 사이에 새끼를 걸고 짚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바위가 보이고, 위쪽에는 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 공간에서 짚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성을 수하인물형(樹下人物形) 구도라고 하는데 17세기 이후 많은 화원들이 즐겨 그렸습니다. 윤두서는 선비화가로서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동물화, 사생화 등 다양한 그림을 세련된 기법으로 그렸는데 특히 생활 주변을 담은 짚신삼기 같은 풍속화를 자주 그림으로써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윤두서의 그림들에는 짚신삼기 말고도 나물캐기, 목기깎기, 돌깨기 같은 풍속화들이 있는데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윤두서는 말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며 타기조차 삼갈 뿐더러 ‘백마도’, ‘어린 새끼와 말’ 같은 그림도 그려 동물에게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 중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