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3.1만세운동 100돌이 되는 날입니다. 1919년 3월 1일 낮 2시 민족대표들은 조선음식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을 요릿집 태화관에서 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태화관은 원래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준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지요. 이 집은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을 몰래 논의한 곳이고,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킨 다음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와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따라서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먹기 위한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기에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고 하지요. 원래는 독립선언 장소로 탑골공원이 정해졌었는데 탑골공원에서 선언을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왜경이 기미를 알아차리면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장소를 바꾼 까닭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태화관 주인 안순환은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곧 궁중 잔치의 으뜸 주방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내놓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기념하여 2019년 2월 25일(월)부터 테마전 ‘독립운동의 힘, 한글’을 연다. 이번 전시는 한글의 다양한 모습과 새로운 자료를 효율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상설전시실 내에 새롭게 마련된 테마전시 공간에서 여는 첫 번째 전시다.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돌 기념 테마전 <독립운동의 힘, 한글> 1894년 한글이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되었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겨레는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도 국어학자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말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전시는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 여기는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선조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조명한다. “한글이 목숨”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대표적인 국어학자 최현배(崔賢培, 1894~1970)는 1930년대 한 음식점 방명록인 《금서집(錦書集, 외솔기념관 소장)》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글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명록의 문구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지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3.1만세운동 100돌, 클래식ㆍ국악ㆍ실용음악 청년예술가들이 참여하여 플래시몹 연주를 한다. 두 대의 피아노로 국악을 알리고 있는 국악듀오 ‘피아노듀오에스’는 장르의 구분 없는 전 세대의 음악인들과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아리랑 연주 영상을 제작하여 3월 1일 공개할 예정이다. 듀오에스가 직접 편곡한 아리랑은 그들의 듀오 연주를 시작으로 ‘가야금 앙상블 지금’이 국악기 파트를 이어간다. 뒤이어 거문고, 생황, 해금의 연주가 이어지고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악기 양금이 뒤를 잇는다. 나라 안 으뜸 양금앙상블인 ‘한국양금앙상블’이 대중들에게 친숙한 아리랑 선율을 연주하여 양금의 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방면으로 활동중인 실력파 대금 연주자 백다솜의 독주로 국악기 부분의 아리랑이 마무리된다. 국악기 부분이 마무리되면 ‘리더스 플루트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화음과 ‘첼로 앙상블 라레솔도’가 이어진다. 위 두 연주 단체는 각 악기군에서 실력있는 연주로 정평이 나있는 아마추어 연주 단체이다. 이어서 청년예술가들이 모인 ‘앙상블 디그’가 연주하고, 삼성전자 사내 동호회인 ‘나노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와 여러 음악 전공자가 모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완당노인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 늙을 때까지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24살에 북경에 다녀온 후부터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 미불, 이북해, 구양순 등 여러 고전들을 다 섭렵을 하게 되고 만년에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하러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우가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이는 추사의 후배 되는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쓴 《박규수전집》 가운데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라는 글입니다. 유홍준 교수는 “추사체가 변천해 가는 과정을 아주 다섯 줄 밖에 안 되는 이 글 속에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사의 글씨는 추사 개인의 창의력뿐만 아니라, 중국 서예사, 동양 서예사의 큰 줄거리에서 봤을 때 맨 마지막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방금 직산의 싸움터에서 돌아온 중국 병사가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 왜적 선봉대가 모두 흰옷을 입고 들판을 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인이라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 나가 서로 죽이며 한참 동안 교전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조실록》 30년(1597) 9월 9일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때 왜적이 흰옷을 입고 조선 사람인 척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 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흰옷을 좋아했다고 하지요. 중국 위ㆍ촉ㆍ오 때부터 진이 중국을 통일한 때까지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부여(만주 쪽에 있었던 옛 우리 겨레) 전기 기록을 보면 “나라 안에 있을 때는 흰옷을 좋아한다. 흰옷에 큰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퍼시벌 로웰이 쓰고, 조경철이 뒤친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예담, 2001)》에는 “서울은 한 가지 점을 제외하면 내가 본 도시 가운데 가장 어두운 곳이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사람들이 입은 흰옷이다. (중간 줄임) 멀리서 보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른바 ‘컴알못(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 김 모씨는 최근 새 노트북을 사기로 결심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앞선사용자(얼리어답터)로 통하는 친구 정 씨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친구는 열심히 모델과 값을 견주어 보고 알아본 뒤 마지막으로 김 씨에게 확인 차 질문을 던졌다. 친구: 메모리 용량이 8기가인데, 괜찮지? 김 씨: 응? 그럼 용량 모자라면 외장하드 연결해서 써야해? 친구: …..아니~~! 메모리 말야, 메모리. 속도가 이 정도면 되겠냐고. 김 씨: 메모리라며? 메모리가 저장 공간 아냐? 졸업ㆍ입학 시즌을 맞아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새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값이 만만치 않다 보니 이왕이면 싼값에 더 좋은,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사고 싶은 것이 공통된 마음 일터. 쇼핑몰 누리집별로 값 견주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전에 어떤 모델을 사야할지가 더 고민이다. 게다가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컴퓨터 사양 정보를 봐도 뭐가 뭔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어 보자니 나만 모르는 건가 싶어 민망하고, 그래서 혹시 속아 사게 되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5년 우리나라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38명이 목숨을 잃었고, 온나라가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엔 더더구나 전염병이 자주 창궐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서 수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하지요.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고 구한 의원들은 대부분 중인이었지만 양반이나 왕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조선의 제2대 임금 정종의 후손 이헌길(李獻吉)이란 이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헌길도 처음에는 과거를 보고 벼슬길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전염병이 휩쓸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우연히 《두진방(痘疹方)》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지요. 《두진방》은 천연두나 홍역처럼 몸에 열이 나고 부스럼이 나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었는데 이 책은 한계가 있음을 그는 확인하고, 여러 의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양반이 잡학을 하다니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자신이 직접 약제를 만들어 시험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775년(영조 51년) 봄에는 한양에 천연두가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이때 이헌길은 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그가 처방한 약을 먹은 사람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쳐서 죽이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이는 역사가ㆍ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김원봉 의열단의 요청으로 집필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앞머리에서 한 말입니다. 오늘 21일은 그 신채호 선생이 1928년 일경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한 날(1936년)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26살 젊은 나이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펼쳤습니다. 또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드높였지요.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으며,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 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들었으며, 열일곱 살 어린 나이인 1930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했고 오케ㆍ포리돌ㆍ빅타레코드사와 계약한 다음, 〈흥보가〉ㆍ〈춘향가〉ㆍ〈심청가〉등을 취입하여 큰 성공을 거둔 박초월 명창을 아십니까? 박초월 명창은 박록주, 김소희와 함께 3대명창으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한 누리꾼은 국보급 명창인 박초월 선생이 한국의 마리아 카라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106년 전인 박초월 명창이 태어난 날입니다.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젊은 시절 박초월 명창의 학원에서 선생의 사랑을 받으며, 판소리 공부를 할 때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십오 년쯤 뒤에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은 물론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오를 줄 상상도 못했다고 털어놓으며 박초월 명창과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박초월 명창은 김정문ㆍ송만갑ㆍ임방울ㆍ정광수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최영창)은 임진왜란 피난일기 《쇄미록(瑣尾錄, 사회평론아카데미 출판)》을 펴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겪은 오희문(吳希文)이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 동안 기록한 일기를 새롭게 번역한 것이다. 《쇄미록》에는 오희문이란 양반의 눈으로 본 16세기 조선시대의 생활상이 낱낱이 담겨 있다. 필사본 7책 800여 장 분량의 《쇄미록》은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등과 함께 임진왜란과 조선중기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1991년에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이 지난 2000~2002년 《임진왜란 사료총서》(문학편, 역사편, 대명외교편ㆍ전 31권)를 펴낸 이후 15년 만인 2017년에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을 기획하면서 그 첫 대상 자료로 뽑은 것이다. 다년간 국가 국역사업에 종사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를 통해 2년간 번역과 원문의 교감・표점 작업을 진행하여 이번에 모두 8권 1모음으로 펴냈다. 1권~6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한글 번역서를, 7권~8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