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의 명절 ‘설’은 음력으로 지내는 것인데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수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ㆍ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은 것은 물론 세시풍속도 맘대로 즐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겨레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양력설 곧 신정을 설날로 쇠는 일제는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쇠던 설을 ‘구정(舊正)’이란 말을 써서 지내지 못하게 하였지요. 광복 뒤에도 정부가 양력을 기준력으로 삼으면서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양력 1월 1일부터 3일 동안을 공휴일로 했기에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로 잔치처럼 지내는 게 굳어질 정도였지요. 그리고 우리 고유의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 하여 ‘이중과세’라는 허울 좋은 말로 억눌러 양력설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1989년 2월 1일 정부가 ‘관공서의 휴일에 관한 규정’을 고쳐 설날인 음력 1월 1일을 앞뒤로 사흘을 공휴일로 지정, 시행함에 따라 다시 ‘설날’이 완전한 민족명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정’이란 말이 어떻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시작이며, 봄이 왔음을 알리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지요.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ㆍ입춘서(立春書)ㆍ입춘방(立春榜)ㆍ춘방(春榜)이라고도 합니다.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며, 전라도에서는 입춘축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여 입춘에는 꼭 하는 세시풍속이었습니다. 입춘축에 주로 쓰이는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인데 이는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생기고, 새해에는 기쁜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구요. 또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의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의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같은 것들도 씁니다. 그런가하면 귀신을 쫓는 글인 “神茶鬱壘(신다울루)”를 써서 붙이기도 합니다. 신다와 울루, 이 두 신은 귀신들이 다니는 문의 양쪽에 서서 모든 귀신을 검열하는데 남을 해치는 귀신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흘 뒤면 섣달그믐으로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그믐 전날,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보내면 그믐날 새벽에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사람)와 함께 쫓아내는 놀이 곧 <나례(儺禮, 나희儺戱)>를 했습니다. 또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문과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세화(歲畵)라고 부르지요. 섣달그믐은 한 해를 정리하고 설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집안 청소와 목욕을 하고 설빔도 준비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이므로 그해의 모든 빚을 청산하지요. 곧 빚을 갚고, 또 빚을 받으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해 빌린 돈이나 빌려온 연장과 도구들을 꼭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밖에 남은 밥을 모두 먹고, 바느질 등 그해에 하던 일을 이날 끝내야만 했습니다. 묵은해의 모든 일을 깨끗이 정리하고, 경건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생겨난 풍습이지요. 또 섣달그믐 밤에 방, 뜰, 부엌, 곳간, 뒷간 할 것 없이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84년 전 오늘은 러시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1873.6.20~1935.1.31) 선생이 하바로브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던 도중, 심한 독감에 걸려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단천군수 심부름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갔다가 군수가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자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선생은 사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가 된 뒤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고종)에 의해 삼남검사관이 되어 부패한 장교들과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선생은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 뒤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동포들의 대한인국민회총회에서 받던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자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펼쳤지만 안창호ㆍ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畿湖派, 독립운동가 가운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경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7년 8월에 결성된 국악과 록음악을 결합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을 지향하는 음악단체 동양고주파(東洋高周波)는 오는 2월 2일과 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리는 샤르자 월드 페스티벌(SHARJAH WORLD MUSIC FESTIVAL) 콘서트에 초청받아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2월 4일 공연장은 AL Majaz water front이고, 2월 4일은 장소: The Flah Island Amphitheater이다. 이번에 연주될 곡은 어둠이 내린 드넓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표현한 “검은 사막”, 일직선으로 끝없이 뻗어가다가도 순식간에 굴절하는 빛의 다이나믹함을 표현한 “빛의속도”, '성격ㆍ습관ㆍ취향'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차이에 대해 표현한 “틈”, 경이로움과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인 은하를 표현한 “은하” 등이다. 또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니 혼란스러우면서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내용의 “터널”, 무지개 다리를 건너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 친구를 위한 “무지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격렬하게 변화하는 세상을 표현한 “그때와 지금”, 어린시절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동기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에게 의식의 순서를 적은 것을 차례에 따라 소리 높이 읽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였다.(중간 줄임)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이는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임금이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한 것을 두고 우리는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겨레에게는 치욕적인 사건이지요. 이 <삼배구고두례>는 지난 2017년 개봉되었던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주연)>의 중심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은 신념이 달랐던 화친의 우두머리 최명길(이병헌)과 척화의 우두머리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조(박해일)를 잘 그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의 그림 가운데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花鳥畵)가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날짐승 곧 새만이 아닌 네 발 달린 짐승 곧 길짐승까지 동물전체를 포함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양회화권에서 산수(山水)와 인물(人物) 다음으로 많이 그렸지요. 새나 짐승을 곁들이고 꽃이 핀 가지를 그린 화조화는 영모절지화(翎毛折枝畵)라고도 부르는데 그 가운데는 시서화에 두루 능한 17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새와 까치(鳥鵲圖)〉도 있습니다. 세로 112.4cm, 가로 57.3cm 크기의 그림 〈새와 까치〉는 마치 창을 통해 내다보는 듯 나뭇가지에 앉은 한 쌍의 까치와 참새가 주인공입니다. 시원스럽게 뻗어있는 매화가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 있고, 흑백의 대비가 강한 까치는 힘찬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그림 전체적으로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거친 붓자국에서 정직하고도 자연스러운 멋과 문기를 느끼게 되면서 매우 격조 높은 세련미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조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며 큰 공을 세웠으나 영달의 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그리고 학문에 전념한 것은 물론 서화를 즐겨 그렸으며, 경치 좋은 곳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언론을 보면 “'도련님' '처남'…양성평등 어긋나는 가족 호칭 개선”이라는 기사가 나와 갑론을박이다. 여성가족부와 국립국어원은 가족 호칭을 정비해 새로운 이름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배우자의 손아래 동기를 기존에 남편 쪽은 ‘도련님, 아가씨’라며 존칭을 쓰지만, 아내 쪽은 ‘처남, 처제’로 낮춰 불러 문제라는 것이다. 과연 여성가족부와 국립국어원의 얘기가 맞을까? 사실 이 차이는 존칭과 낮춤말 문제가 아니다. 도련님이야 존칭의 느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가씨는 국어사전의 “예전에,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던 말”이란 풀이와는 달리 요즈음엔 미혼 여성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또 처남, 처제에 무슨 낮춤의 의미가 들었다고 억지를 부리는가? 분명히 말하자면 “도련님, 아가씨”와 “처남, 처제” 사이는 토박이말과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한자말인 처남, 처제를 좋은 토박이말로 바꿔 부르게 하면되는 것이다. 그 일은 국립국어원에서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이것이 여성가족부가 발견한 엄청난 일인양발표하고 언론들은 이에 춤추는 것을 보면여성가족부가 할 일이 정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 가면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가 있습니다. 이 비는 성재산 적성산성 안에 세워진 신라시대의 비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높이 93㎝,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입니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은 모양으로 양 옆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듯 자유로운 모습이지요. 전체의 글자 수는 440자 정도로 짐작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288자는 그 크기가 2㎝ 안팎의 작고 또 얕게 오목새김으로 새긴 글씨임에도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던 덕분인지 거의 판독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글씨는 각 줄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비문에는 신라 이사부 장군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빼앗은 뒤,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 등을 포상함과 동시에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포상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를 통해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 율령과 조세제도 등 기존 문헌 자료에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