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지금의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 노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입니다. 또 《삼국유사》의 <처용랑ㆍ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ㆍ파랑ㆍ검정ㆍ빨강ㆍ노랑의 옷을 입은 5명의 남자가 춤을 춥니다. 처용무의 특징은 자기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 데 있습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용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섣달그믐 밤 - 강순예 “오늘밤에 온단다, 신 없는 아이. 고샅마다 집집마다 들어가 이 신발 저 신발 죄다 신어보곤 맞갖은 걸 골라, 하무뭇 해낙낙 홀딱 신고 가버리는…….” 깊은 밤 문 앞에 살며시 내다 놓았다. “작아서 안 신는 신발이야. 맘에 들면 가져가렴.” 사흘 뒤면 섣달그믐날이 된다. 또 다른 말로는 ‘까치설날’인 섣달그믐날에 우리 겨레에겐 많은 세시풍속이 있었다. 특히 섣달그믐은 한 해를 정리하고 설을 준비하는 날이다. 그래서 집안청소와 목욕을 하고 설빔도 준비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이므로 그해의 모든 빚을 청산한다. 곧 빚을 갚고, 또 빚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빌린 돈이나 빌려온 연장과 도구들을 꼭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밖에 남은 밥을 모두 먹고, 바느질 등 그해에 하던 일을 이날 끝내야만 했다. 묵은해의 모든 일을 깨끗이 정리하고, 경건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생겨난 풍습이다. 또 재미난 것은 《동국세시기》에 나온 ‘양괭이귀신(야광귀, 夜光鬼) 물리치기’라는 것도 있었다. 섣달그믐 양괭이 귀신은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모두 신어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유산 가운데는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도 있습니다.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합니다.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백동연죽이라 하며,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하지요.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뒤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입니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되지요.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 데다가 구조상 부서지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들고 간혹 사기제품도 볼 수 있으나 극히 드뭅니다. 물부리는 쇠붙이에 한하지 않고 옥(玉), 상아, 쇠뿔같이 비교적 여러 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입니다. 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무늬가 없는 백동연죽은 민죽, 무늬가 예쁜 것은 별죽ㆍ꽃대라 부릅니다. 별죽은 재료에 따라 은물죽, 오동죽이라고 하지요. 백동연죽을 만들 때는 가장 먼저 백동을 만드는데 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장상훈)은 유물보존총서Ⅹ 《수령의 선정을 기리는 선물: 만인산》(아래 『《만인산》)을 펴냈다. 《만인산》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만인산 4점과 천인산(千人傘) 1점에 대한 보존과학 및 민속학 분야 연구 성과물로 향후 만인산 연구의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만인산을 아시나요? ‘만인산’은 조선 후기에 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일산(日傘)의 일종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수 놓여 있다. 참여한 사람들의 수나 고을의 규모에 따라 천인산 또는 만인산이라 하는데, 만인산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이었다. 직장을 떠나거나 다른 부서로 옮겨가는 이에게 그의 공적을 기리며 제작하는 오늘날의 기념패와 그 맥락이 비슷하다. 비단에 오색실로 덕을 기리는 송덕문(頌德文)에 참여자들 이름을 더하고 길상을 의미하는 보문(寶紋)부터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十長生)까지 다양한 문양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 만인산 보존ㆍ복원을 위한 이십여 년간의 여정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만인산 5점은 1873년에서 1887년 사이에 만든 것들로, 구성과 재료, 제작 기법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직물, 목재, 금속 등의 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즈음 ‘명태균 게이트’로 유명한 명태균 씨는 사람들이 자기보고 ‘미륵’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권 50, 궁예 편에 나오는 기록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후기에 후고구려(뒤에 태봉)를 세운 궁예는 늘 자신을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런 그는 자기 부인 강 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하여 충언을 올렸지만, 관심법(觀心法,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들먹이며 간통한다고 뒤집어씌워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미륵불(彌勒佛)이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를 이릅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이 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뜻을 담았습니다. 어느 시대건, 지배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구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억압받는 민중의 바람이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미륵신앙(彌勒信仰)입니다. 미륵신앙은 서양 기독교의 구세주 신앙과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보이는건 쓸쓸한 거리 불어오는 바람뿐인데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쓸어올리며 가던걸음 멈추어서서 또 뒤를 돌아다보네 어두운밤 함께하던 젊은소리가 허공에 흩어져가고 아침이 올때까지 노래하자던 내친구 어디로갔나 머물다 간 순간들 남겨진 너의 그 목소리 오월의햇살 가득한날 우리마음 따스하리 가수 이선희는 '오월의 햇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이선희의 5집 앨범 '나의 거리 (1989)'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로 작사와 작곡 모두 윤항기가 맡았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표현한 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5.18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청춘들을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래는 전주가 브라스밴드로 시작하여 장엄한 피아노로 이어지고, 다시 부드러운 기타로 연결되면서 청춘의 넋을 달래주는 진혼곡으로도 평가되는 노래다. 이 이선희의 노래와 같은 이름의 연극 '오월의 햇살(극단 돋을양지, 대표 이기영)'이 서울 혜화동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에서 지난 12월 18(수)부터 12월 29(일)까지 공연되고 있다. 지난 23일 눈빛극장에서 만난 '오월의 햇살'은 내게 그동안 생각지도 않던 물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한국 강탈의 원흉, 동양 평화의 교란자 철천지 원수 이등 놈을 내 손으로 처단한다." 품속에서 부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우루루루루 달려나가 이등의 우측 가슴을 향해 정면으로 발사한다. 탕탕탕-- 거들먹대던 이등이 놀란 눈으로 주춤하며 비틀거리다 짐승처럼 거꾸러질제 (가운데 줄임) 안중근 거동 봐라, 벌떡 일어나며 하늘에 대고 외친다.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무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피를 토하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어제 12월 22일 저녁 4시,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임진택 창작판소리 50돌 기림 송년 마무리 공연 “창작판소리 <안중근>, 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공연이 펼쳐졌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명창이자 작가인 임진택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바탕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한 작품이었다.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로 볼때 안중근이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조적 예술정신이 요구된다고 임진택 명창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지 팥죽 - 전병윤 동지는 눈보라와 함께 몰아쳐 온다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악귀를 쫓는다. 집과 나라 안에 재앙이 없도록 해 달라시던 할머니는 "사색당파싸움, 임진왜란, 동학란도 역귀의 작란이다"고 하셨다. 그래 삼팔선의 철조망, 이스라엘이나 이라크의 전쟁도 역귀의 작란이 틀림 없겠다 이제 그만, 역귀 없는 세상을 위해서 한솔 푸지직푸지직 끓어오르는 평화의 팥죽을 쑤어야겠다.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절기 ‘동지(冬至)’로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이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다. 동짓날 팥죽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절기 ‘동지(冬至)’로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지요.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 형초(荊楚, 지금의 후베이ㆍ후난 지방)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옵니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돌림병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림병 귀신을 쫓으려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전병윤 시인은 <동지 팥죽>이란 시에서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는 12월 22일 저녁 4시, 27일 저녁 4시에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 임진택 창작판소리 50돌 기림 송년 마무리 공연 “창작판소리 <안중근>, 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공연이 펼쳐진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명창이자 작가인 임진택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기본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하였다. 임진택 명창은 왜 판소리 <안중근>을 창작하였는가? 1945년 광복 직후 박동실 명창이 이준ㆍ안중근ㆍ윤봉길 세 분의 의거를 담은 <열사가>라는 판소리를 창작한 바 있다. 하지만, 박동실 명창이 6·25 때 월북함으로써 그가 남긴 열사가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음은 물론, 또한 열사가 안의 안중근 대목은 불과 20분 정도 분량으로 온전한 한바탕의 소리로서는 부족함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박동실 선생의 안중근 판소리는 지금 잘 불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세로 불 때 안중근이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