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지 팥죽 - 전병윤 동지는 눈보라와 함께 몰아쳐 온다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악귀를 쫓는다. 집과 나라 안에 재앙이 없도록 해 달라시던 할머니는 "사색당파싸움, 임진왜란, 동학란도 역귀의 작란이다"고 하셨다. 그래 삼팔선의 철조망, 이스라엘이나 이라크의 전쟁도 역귀의 작란이 틀림 없겠다 이제 그만, 역귀 없는 세상을 위해서 한솔 푸지직푸지직 끓어오르는 평화의 팥죽을 쑤어야겠다.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절기 ‘동지(冬至)’로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이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다. 동짓날 팥죽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둘째 절기 ‘동지(冬至)’로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날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지요.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원래 팥죽은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 형초(荊楚, 지금의 후베이ㆍ후난 지방)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옵니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돌림병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림병 귀신을 쫓으려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전병윤 시인은 <동지 팥죽>이란 시에서 “눈이 쌓여 오도 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는 12월 22일 저녁 4시, 27일 저녁 4시에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에서 임진택 창작판소리 50돌 기림 송년 마무리 공연 “창작판소리 <안중근>, 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공연이 펼쳐진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명창이자 작가인 임진택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기본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하였다. 임진택 명창은 왜 판소리 <안중근>을 창작하였는가? 1945년 광복 직후 박동실 명창이 이준ㆍ안중근ㆍ윤봉길 세 분의 의거를 담은 <열사가>라는 판소리를 창작한 바 있다. 하지만, 박동실 명창이 6·25 때 월북함으로써 그가 남긴 열사가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음은 물론, 또한 열사가 안의 안중근 대목은 불과 20분 정도 분량으로 온전한 한바탕의 소리로서는 부족함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박동실 선생의 안중근 판소리는 지금 잘 불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세로 불 때 안중근이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3일 오후(현지 시각)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제19차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12. 2.~12. 7.)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Knowledge, beliefs and practices related to jang-making in the Republic of Korea)」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하였습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장 담그기’라는 공동의 행위가 관련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며,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무형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문화다양성 증진에 이바지하는 등 인류무형유산 등재 요건을 충족한다고 평가하였지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한국음식의 기본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 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 기술을 모두 포함합니다. ‘장’은 한국인의 일상음식에 큰 비중을 차지해 왔고,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나누어 먹는 문화가 세대 간에 전승되어 오며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기능을 해왔습니다. ‘장 담그기’는 2018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올랐지요. 이번 「한국의 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사하여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이는 《세종실록》 49권, 12년(1430년) 7월 5일의 기록입니다. 세종은 당시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으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님을 잘 알고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세종은 안건이 올라오면 마지막에는 자기가 결정하더라도 신하들이 충분히 갑론을박하게 하였습니다. 들판을 지나갈 때면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재유(齋儒, 성균관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권당(捲堂,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시위)하고 말하기를, ‘대사성 윤명규(尹命圭)는 (가운데 ᄌᆕᆯ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하교하기를, ’잘 살피지 못하여 또 이런 욕된 일이 있었다. 비록 이 일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탓이겠으나, 이미 나에게까지 알려진 이상 그냥 있을 수만은 없으니, 대사성은 파직하고 여러 유생은 들어가도록 권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1831) 12월 14일 기록입니다. 조선시대 으뜸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국가의 정책이나 당시의 시급한 일에 대한 자신들의 집단의사 표시로서 우선 편전 앞에서 '아이고상소'를 했습니다.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고 밥을 먹지 않는 권당(捲堂)을 합니다. 이래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젠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공관(空館)입니다. 이러면 임금의 통치력에 커다란 결함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일이 됩니다. 500년 조선 역사를 통해 이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도 둑 - 택당(澤堂) 이식(李植) 姦宄無常産(간귀무상산) 간사한 도적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데다가 飢荒又一時(기황우일시) 굶주림과 가뭄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어서 近村聞警急(근촌문경급) 이웃 마을의 위급한 소식 들어보니 相識有創夷(상식유창이) 알고 지내는 이들도 약탈당했다네 自幸囊中淨(자행낭중정) 다행이구나! 주머니 속이 깨끗하니 應無棟上窺(응무동상규) 당연히 대들보 위에서 엿보는 사람 없으리라 穿墉何足磔(천용하족책) 좀도둑들이야 어찌 나를 죽이리 城社有狐狸(성사유호리) 도성과 종묘에 여우와 살쾡이 있으니 이 시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1628년 충주목사에서 파직되어 택풍당(澤風堂)으로 물러난 여름에 지은 것으로, 당시의 문제점에 대해 노래한 한시다. 이식(李植)은 이정구ㆍ신흠ㆍ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히는 뛰어난 학자며,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식은 1623년 인조반정 뒤 이조좌랑이 되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지냈다. 특히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내가 앉은 건너편 의자에 앉은 사람 7명 모두가 슬기말틀(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통화를 하고 있고, 한쪽 끝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조차도 슬기말틀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특히 그렇게 슬기말틀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길에 나가면 심지어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슬기말틀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보는 내가 아찔합니다. 슬기말틀이 나타나면서 슬기말틀은 출판시장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합니다. 백 그램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녀석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영상과 뉴스, 메시지를 보느라 대한민국 성인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은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하지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변명하는 가장 큰 까닭으로 '돈이 없다‘라거나 ’시간이 없어서'를 말하지만, 실제는 슬기말틀에 빠져 사느라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유치원에 다닐만하면 아예 슬기말틀과 함께 사는 것이 요즘 아이들입니다. 부모가 슬기말틀에 빠져 책을 멀리하다 보니 아이들도 당연히 그렇게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이야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부모를 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83년 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한 날입니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書)’를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드러냈고,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성명서는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 있으며 축심국(軸心國, 일본 등)에 대하여 선전한다"라며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몰아서 쫓아냄)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한다"라고 선언했지요. 또한 “임시정부는 합병조약과 모든 불평등조약은 무효라 하고, 남경 및 만주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한 뒤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 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함께 수행하는 등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벌였는데 영국군들이 수행할 수 없었던 대적방송, 적문서 번역, 전단 제작,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며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 미국의 전략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가운데 줄임)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러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10월 20일 노무현시민센터 지하 2층 공연장에서는 민족작가연합, 한국민족춤협회가 주관하고 평화통일시민연대 등 10여 개 단체가 함께 주최하는 제3회 통일예술제가 열렸다. 또 이날은 고 김남주 시인의 30주기를 기리고, 시 낭송과 노래, 춤, 통일 발언, 정세 해설을 통하여 통일 의지를 공유하는 자리로 꾸며졌다. 특히 고 김남주 시인의 일대기를 장숙자 명창이 판소리로 녹여냈다. 고 김남주(金南柱, 1946년~1994년) 시인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시민ㆍ사회 운동가다. 유신을 반대하는 언론인 《함성》을 펴냈고 인혁당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