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 누차 상소하여 나이가 들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병이 들었는데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가 틀림없이 관례에 따라 예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할 것인데, 너는 모름지기 내가 죽으며 남긴 뜻이라 말하고 상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라. 그리고 묘도(墓道)에도 비갈(碑碣,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세우지 말라.‘ 하였다.(가운데 줄임) 그로부터 며칠 뒤 죽었는데 준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1570년) 12월 1일 기록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죽음에 관한 얘기입니다. 조선조 중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은 평생 올바른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며 학문과 수양,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가 들자,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벼슬을 사양하려 했고, 죽기 전 아들에게 나라에서 조의금이나 장례용품 주면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지요. 요즘 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첫눈 편지 - 장인성 첫눈이 내렸습니다 단풍이 다 지기도 전에 홍시가 다 덜어지기도 전에 첫눈이 왈칵 내렸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합니다 천지를 하얗게 덮은 날도 임은 소식이 없습니다 홍시가 익으면 따달라고 했는데 온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내심 기다려는 보지만... 한해가 다 저물어 갑니다 흰 눈 덮인 홍시는 더욱더 빨갛습니다 임이 안이 오시면 까치밥이 됩니다 임도 첫눈이 온 줄 아실 덴데 그 임이 더욱더 미워집니다. 며칠 전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 탓에 곳곳에선 교통사고가 나고 출근하는 이들은 지각하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는 눈이 오는 게 그렇게 반갑더니 이제 교통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늙기는 늙었나 보다. 하지만, 첫눈이 오는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24절기의 여덟째인 소만(小滿) 무렵 어떤 이들은 손톱에 봉숭아를 물들이고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빠지지 않으면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첫눈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첫눈은 단풍이 다 지기도 전에, 홍시가 다 덜어지기도 전에 왈칵 내려버렸다. 장인성 시인은 그의 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사품 벼슬) 구치곤(丘致崐)이 아뢰기를, "지금 중의 무리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먹고 있으니, 백성에게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이 심합니다. 이들을 군대에 편입시킨다면 군사가 어찌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평안도(平安道) 백성 가운데 중이 된 사람은 다른 도(道)보다 곱절이나 되니, 청컨대 모두 찾아내어 군대의 정원(定員)에 편입시키소서." (가운데 줄임) "지난 정해년에 호패(號牌)를 시행하였을 때도 중의 무리가 30여 만 명이나 되었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지금은 거의 40여 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위는 《성종실록》 111권, 성종 10년(1479년) 11월 29일 치 기록입니다. 중의 무리가 40여 만 명이나 돼 군사가 넉넉하지 않다고 하며, 중들을 군대에 보내도록 하자고 합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가 되자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바뀌면서 불교를 탄압하고 이에 따라 따라서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262칸에 달하던 대가람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융성하였습니다. 다만, 그렇게 번영했던 회암사는 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형유산 속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학문적 성과로 꽃피고, 그 성과가 다시 우리의 삶과 미래를 비추는 하나의 등불이 될 때, 우리는 이를 “무형유산의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형유산학회의 ‘Janelii×임돈희 무형유산 학술상’은 학문적 연구와 전승 현장을 연결하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상징적 출발점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11월 22일 청주 도시재생허브센터 어반아트홀에서 열린 제1회 시상식에서는 프롬히어의 설지희 대표가 첫 수상자로 뽑혔다. 그의 논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 전기 선장의 역할과 선박 기술문화」는 조선 전기 선박 기술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선장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며, 전통 기술문화를 탐구한 연구다. 전통을 살리고, 학문을 이어가는 상의 탄생 자넬리×임돈희 무형유산 학술상은 무형유산 연구의 세계적 대부인 자넬리 교수(Roger L. Janelli, 1943~2021)와 한국 무형유산학의 선구자인 대한민국학술원 임돈희 회원의 뜻을 기리며, 두 학자가 출원한 기금을 기반으로 제정되었다. 이 상은 지난 2년 동안 《무형유산학》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가운데 가장 우수한 연구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무형유산학회(Intangible Heritage Association)가 지난 21일 국가유산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으며 공식 출범했다. 이는 2024년 8월 18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창립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친지, 약 3달 만의 결실로, 무형유산 연구와 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다. 무형유산학회는 2015년 임돈희, 함한희 명예교수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세계 첫 무형유산 연구 학술단체다. 설립 초기부터 무형유산을 ‘살아있는 유산’으로 정의하며 학제 간 협력을 통해 학문의 지평을 넓히는 데 주력해 왔다. 2015년 창립 이후 현재까지 한 해에 두 차례 춘계ㆍ추계 학술대회를 꾸준히 열어 모두 20회의 학술대회를 진행했으며, 학술지 《무형유산학》도 2016년부터 해마다년 두 번씩 펴내 모두 18권을 출판하며 무형유산 연구의 깊이를 더해왔다. 사단법인화 과정과 의미 8월 18일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발기인 7명(박정석 이사장, 윤동환ㆍ정성미ㆍ이미령ㆍ설지희 이사, 김형근ㆍ오세미나 감사)을 비롯해 약 50명의 위임 동의와 회원들이 참여하여 학회의 법인 전환을 의결했다. 이후 국가유산청의 설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춘풍 이불 아래로 서리서리 넣었다가 우리님 오신 날에 밤이거나 낮이거나 / 굽이굽이 펴드리라 / 언제나 그립고 그립던 님을 만나서 세세원정을 헐거나 헤~~” 무대에서는 아쟁 이태백 명인이 작곡한 ‘육자배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라도 민요 가운데 가장 예술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육자배기와 흥타령을 다양한 장르로 선보인다. 대표적인 남도소리 소리꾼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김나영 명창이 걸쭉한 소리로 풀어내는 것이다. 어제 11월 27일 저녁 7시 30분 서울 돈화문국악당에서는 <김나영의 남도소리 : 향연>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김나영은 성창순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소리꾼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태백 명인에게 남도잡가, 진도씻김굿 등을 배우며 소리의 영역을 확장하였고 음반 <꽃과 같이 고운님>을 발매하였다. 김나영은 2014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대통령상을 받았고, 2019년 진도민요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명창이다. 현재 (사)성창순 판소리보존회 이사장과 목원대학교 국악과 교수를 하고 있으며, 활발한 활동과 함께 후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판소리 5대목 곧 춘향가ㆍ심청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 사설은 역사적, 인류사적, 문화적, 문학적, 예술적, 민족적, 민중적, 언어적, 전통적, 사회적인 내용이 총망라된 것으로 2003년 11월 7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무형문화 자산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사설의 뜻도 모르고 판소리를 하거나 듣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판소리의 사설이 주로 한자와 한시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아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설교육을 해야만 판소리를 이해하고 흥미를 갖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에 (사)한국판소리보존회에서는 2014년 심청가, 2015년 춘향가, 2016년 수궁가의 사설풀이 교육을 하고 사설집을 펴냈으나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가 2023년 전수교육관 활성화 사업으로 판소리 수궁가 사설 풀이 교육을 했고 2014년에는 흥부가로 이어가는 것이다. (사)한국판소리보존회에서는 문화유산청 국가유산진흥원, 서울 강남구청의 후원을 받아 지난 5월부터 12월까지 매주 금요일 낮 3시부터5시까지 모두 30회 예정으로 인류무형유산 판소리 <흥부가> 사설교육을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1월 12일 언론에는 “국보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탑’이 1,975㎞ 긴 유랑 끝에 113년 만에 복원을 마치고 고향 땅에 우뚝 섰다.”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승탑 전체에 걸쳐 코끼리 눈 무늬, 구름무늬, 넝쿨무늬, 불보살, 봉황, 신선, 구슬, 가릉빈가(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 등 화려한 무늬가 돋보이는 승탑입니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원주시는 오랜 유랑 생활을 끝내고 원래 자리였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다시 세운 지광국사탑을 기려 복원 기념식을 연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승탑(僧塔)으로 평가받는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처음 반출된 뒤 1,975㎞에 달하는 길고 긴 유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울 명동(1911~1912)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문화재 약탈과 불법 반출에 관한 나라 안팎의 비난이 거세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직접 운송비까지 내가며 찾아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지광국사탑은 6·25 때 폭격을 맞아 1만 2,000개로 조각났다가 1957년 시멘트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오 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 하루 놀려다가 뚜드려 맞았네 / 몽두리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 감독놈들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석탄 담아내라 했네.” 이 노래는 <강제연행된 조선인 석탄광부의 노래> 가운데 일부입니다. 지난 2010년 8월 6일부터 17일까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주관으로 갔던 '경술국치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나가사키,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등지의 조선인 강제노동현장과 여러 추도시설 그리고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 강제로 합동 제사 되는 조선인 2만 1천 명의 영혼을 유족이 원하는 곳에서 제사 지낼 수 있도록 요구하는 답사 일정이었습니다. 그때 답사단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끌려가서 강제노역하다가 죽은 조선인 얘기를 듣고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요. 최근 언론에는 “사도광산 뇌관이 끝내 터져 군함도에 이어 일본에 또 '뒤통수'를 맞았다.”라고 성토하는 기사가 줄을 잇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는 12월 1일(일) 저녁 5시, 서울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김연정의 승무와 태평춤 이야기 – <춤이 말을 걸다>’ 공연이 펼쳐진다. 이에 무대에 오를 춤꾼 김연정을 만나 이번 공연을 하게 된 배경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어떻게 한국춤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5살 무렵 언니를 따라 춤을 배우다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겨, 선화예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선화예고를 나와서 서울대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후 이애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님께 승무를 중심으로 여러 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 공연을 승무와 태평무로 한정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애주 선생님께서도 승무가 우리 춤의 중심이라고 얘기를 해주셨고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저도 승무가 또 모든 한국춤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단도 여러 가지가 다 들어가 있고 또 북도 쳐야 하고 춤도 느린 춤부터 빠른 춤까지 다 있고, 그리고 철학적인 깊이도 있어서 승무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태평춤은 한성준, 한영숙 선생님으로 이어 내려온 춤인데 경기도당굿의 악과 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