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웃 사람 - 허홍구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가끔 낯선 분의 인사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하며 반갑게 웃음꽃 피우며 지나가신다. 어, 내가 아는 사람인가? 누구지 하고 궁금했었다 나는 모르겠는데 저분은 나를 어떻게 알까? 다음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그래, 우리 서로 모른다 한들 어찌 이웃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낯설어도 같은 동네 가까운 이웃이다. 예전 농가에서는 한로, 상강 무렵 가을걷이로 한창 바빴다.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이때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바쁘고,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쁨을 나타낸 말들이다. 이렇게 바쁘게 일하다 허기진 농부들에게 기다려지는 게 새참 때였고 이때 빠질 수 없었던 것은 막걸리였다. 막걸리는 이른바 '앉은뱅이 술'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이야기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대 너무 아름다워요 그대 너무 부드러워요 그대 너무 맛이 있어요 감사합니데이 위 노래는 2002년 발표한 강산에의 7집 음반에 있는 노래로 함경도 사투리가 맛깔나는 ‘명태’입니다. 국민 생선 명태는 지방, 크기, 어획 방법 등등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가장 흔하게 불리는 별명은 북어(北魚)지요. 명태는 북어말고도 이름이 참 많은데 우선 생태(生太), 동태(凍太), 노가리가 있고, 알을 막 낳고 잡힌 명태는 꺽태, 알을 밴 채로 잡힌 명태는 난태, 눈과 바람을 맞으며 낮에 녹았다가 밤에 얼기를 너덧 달 반복하면 해장국의 으뜸 재료인 황태가 됩니다. 재미난 것은 황태를 만들 때 바람이 많이 불면 육질이 흐물흐물해진 찐태가 되고, 너무 추우면 꽁꽁 얼어붙은 백태가 되며, 너무 따뜻해지면 검게 변해서 먹태가 돼 상품 값어치가 떨어지고 서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명태를 잡을 때 따라 봄에 잡은 것은 춘태, 늦봄 마지막에 잡은 것은 막물태, 가을에 잡은 것은 추태라고 부르며, 어획시기에 따라 일태, 이태, 삼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이 동유럽 국가를 무대로 종묘제례악 알리기에 앞장선다. 오는 9월 21일(목) 19시(현지시각) 헝가리 에르켈 극장과 9월 25일(월) 19시(현지시각) 폴란드 바르샤바필하모닉홀에서 종묘제례악 전막을 공연하고 국악 특강과 종묘제례악 복식 시연회 및 특별 전시 등을 연다. 이번 순회 공연은 첨단산업을 포함하여 경제, 안보 등 다방면에서 협력자로 자리매김한 폴란드와 지난해 70억 달러 규모로 사상 가장 많은 양국 교역을 기록한 헝가리 등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는 동유럽권에 한국 전통음악을 통한 문화적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예와 악으로 통치하는 것을 으뜸 값어치로 여겼던 조선왕조 500년. 종묘제례는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던 조선 왕실의 가장 큰 행사였다. 그 종묘제례를 올릴 때 연주했던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이 직접 작곡한 음악으로 왕실 음악기관인 장악원 악공들이 연주하던 전통을 국립국악원이 계승하고 있는데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한다. 그런데 이 제례악들에는 민속악에서 쓰지 않는 특별한 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국악기 가운데 관악기로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가 있습니다. 피리는 관악기 가운데 가장 작은 것으로 향피리의 길이가 보통 30cm 정도고 세피리는 더 작아서 지름이 1cm도 안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악기 편성에서 중심이 되었고, 작지만 다른 큰 악기들을 압도할 만큼 큰 소리가 나는 당찬 악기입니다. 피리 가운데 향피리는 향악 연주에서 주선율을 맡습니다. 특히 많이 연주되는 여민락, 영산회상(靈山會相), 수제천 따위에서 핵심 관악기로 연주되고 있지요. 향피리는 당피리(唐)와 함께 고려 때 중요한 관악기의 하나로 연주됐다고 《고려사》 권71 “악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리의 그림이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권132 “오례의(五禮儀)”의 악기도설인데 좀 더 자세한 향피리의 그림과 설명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 나오지요. 당피리는 성종 때 당비파 등과 함께 종묘제례악의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등에서 연주됐다고 《악학궤범》 권2에 나오는데 지금도 낙양춘(洛陽春), 보허자(步虛子), 본령(本令) 따위 연주에서 합주를 이끌어 가는 주선율 악기입니다. 또 세피리는 몸통이 향피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의 큰 명절 ‘한가위’가 채 20일도 남지 않았다. 곳곳에서는 벌써 명절 잔치가 시작된 듯하고 각 기업체는 명절맞이 선물 광고에 한창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는 ‘한가위’라 쓰고 누구는 ‘추석’이라고 쓴다. 심지어 추석은 ‘秋夕’이라고 한자로 써 놓기도 한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명절을 두고도 왜 각기 다른 말을 쓰는 것일까? 먼저 ‘추석’과 ‘한가위’의 말밑(어원)을 살펴본다.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했다. 그래서 우리도 예전 ‘중추절’이라 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추석월”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란 생각이다.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가위”는 ‘크다’라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던 곳)의 말을 듣건대 책을 들고 따라왔다가 금란소(禁亂所)에 잡힌 된 사람이 퍽 많았다고 했다. (가운데 줄임) 또다시 범할 적에는 결단코 덮어줄 수가 없을 것이니, 성균관(成均館)이 여러 유생을 타일러서, 다음에는 과장 안에 책을 들고 따라 들어오는 난잡한 폐단들을 다시 더 거듭 못 하게 하라." 하였다. 위는 《정조실록》 정조 7년(1783년) 9월 9일 치 기록입니다. 조선 말기 과거시험은 심각한 부패로 물들었습니다. 특히 부유한 사대부들은 즐기며 한가롭게 노느라 평소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리고 있다가 과거시험이 있으면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대신 글을 짓거나 쓰게 했습니다. 요즘의 대리시험과 같은 것이지요. 이때 글을 짓는 사람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은 베껴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수(寫手)라 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에 보면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朝報) 곧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하는 관보를 들춰보다가 과거를 연다는 기사를 보면 “거벽과 사수는 어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 을 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24절기 ‘처서’가 지나고 어제는 ‘백로’였다. 이제 바야흐로 가을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볕이 따갑다. 그래야만 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소리가 분명해진다. 또 농촌에서는 그 땡볕에 고추를 말린다. 그뿐이 아니다. 처서가 지난 무렵 우리 겨레는 ‘포쇄(曝曬)’라는 걸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민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데, 이는 오래된 풍속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농가월령가> 7월령에는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擧風)하고, 의복도 포쇄(曝曬) 하소”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에 포쇄별관을 보내 실록을 포쇄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 또 선비들은 이때 여름철 동안 눅눅해진 책을 말린다.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8월 24일 문화재청은 충무공 이순신의 숭고한 행적이 서려 있는 보물 <이순신 장검(長劍)>을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은 길이가 약 2m에 달하며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두 자루 한 쌍이 각각 칼집을 갖추고 있지요. 장검 1의 칼날 위쪽 부분에는 이순신이 직접 지은 시구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이, 장검 2에는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충무공전서》(1795)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칼집에는 몸에 찰 수 있도록 가죽끈을 매달았으며, 칼자루 속 슴베(칼날에 홈을 낸 것으로 피가 흘러나오도록 만든 것)에 새겨진 ‘갑오사월일조태귀련이무생작(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이라는 글귀로 만든 때와 만든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검>은 조선시대 군용 도검 형식입니다. 나무틀 위에 어피를 감고 주칠을 한 칼자루,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돌기를 만들어 칼자루 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독도 전문가 안동립(동아지도 대표이사)이 최근 《독도 / 안동립의 독도 이야기(2005~2022)》를 펴내고 오는 9월 5일 낮 3시 30분 국회도서관 지하 강당(B105호)에서 《독도 / 안동립의 독도 이야기》 출판 기념회를 엽니다. 이번에 펴낸 책은 2005년부터 2022년까지 17년 동안 90일 정도를 독도에 머물며 독도의 지형과 식생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온 결과물입니다. 이 책의 값어치는 단순히 독도의 사진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은이가 이상균 씨와 함께 쓴 독도에 관한 논문 요약본을 실어 이 책이 독도를 깊이 숙고하고 연구한 결과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야 독도에 갔다고 해도 잠깐 들러볼 뿐이기에 독도의 풍광을 제대로 볼 수가 없지요. 독도에서의 해돋이와 해넘이, 별 헤는 밤은 물론 괭이갈매기 등의 동물, 해국 등의 식물들도 실제 맨눈으로 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런 독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독도의 동도와 서도 전경을 담은 사진은 무려 560×228mm의 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도의 바람 소리, 괭이갈매기의 화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달 팽 이 - 이시향 남의 말 듣는 게 좋아 달팽이는 느릿느릿 걷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달팽이는 귀가 몸보다 커다랗게 되었습니다. 남이 한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달팽이관 안에 작아진 몸을 집어넣은 달팽이가 느릿느릿 걷습니다. 조선시대 으뜸으로 손꼽을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던 세종 때 신하들 가운데 인품이나 경륜, 학식 등에 있어 세종에 버금갈 학자들이 많았음은 물론 선왕이었던 태종 때부터 정승 반열에 있던 노련한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세종은 크게 삐걱거림 없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세종은 학문을 연구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을 종요롭게 생각하여 재위 기간 무려 1,898회나 열었는데 매달 5회 정도 경연을 연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경연 석상에서 세종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신하의 말이나,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 못마땅한 발언에 대해서도 이를 곧바로 공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종은 일단 “경의 말이 좋다”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뒤, “이런 면은 어떻겠는가, 이러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부드럽게 자기 뜻과 주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