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상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ㆍ《여계(女誡), 여자의 생활과 처신에 관한 계율》ㆍ《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 궁에 딸린 하인)으로부터 조정 벼슬아치의 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배우게 해서, 온 나라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우리는 흔히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조선시대 동안 홀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년) 6월 27일 기록을 보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과 같이 일상에 절실한 것들은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어 온 백성이 공부하게 하자고 임금에 아룁니다. 이에 중종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를 내릴 정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인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이 있을 정도였으며,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 이재명 정부는 파격적으로 장관을 인선하여서 화제입니다. 세상사 특히 나랏일에는 인사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인재등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런 고민은 조선시대 세종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세종은 자신보다 30여 살이 더 많은 아버지 태종 때의 재상들 곧 황희ㆍ허조ㆍ맹사성 등을 재등용하고, 관노 출신 장영실을 곁에 두는 정말 파격적인 인사를 하였습니다. 양반 사대부가들이 온갖 나랏일을 떠맡던 시대에 관노 장영실을 곁에 두고 당시 중국도 만들지 못한 자명종시계 곧 자격루를 만들게 한 세종의 인재 등용술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격루는 그동안 전해지지 않았는데 지난 2007년 자격루연구회 이사장 남문현 건국대 교수와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학예사를 중심으로 한 천문과학자와 국가무형문화재 기능장 등 30여 명이 함께 하여 무려 570년 만에 보루각 자격루는 제 모습을 찾아 국립고궁박물관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자격루는 한쪽에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 소파수호로 물을 흘려보내 시간을 가늠케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한쪽에선 자축인묘...(子丑寅卯) 등 12지신 글씨 팻말을 쥔 인형들이 나와 시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가 자식의 병으로 근심 중이었는데 강세황이 와서 거문고를 연주해 주었다. 그의 음악은 근심하는 사람은 기쁘게 하고, 병든 사람은 소생하게 하는 듯했다. (가운데 줄임) 어쩌면 그렇게 소리가 맑아서 사람을 감동을 주는가?” 이는 성호 이익의 《성호전집(星湖全集)》에 나오는 글로 강세황이 그림뿐만이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으며, 그가 거문고 연주로 슬픔과 기쁨을 주변과 함께 나누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강세황은 8살에 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관직에 나가야 할 즈음엔 집안이 기울고, 집권세력에 밀려 벼슬길이 꽉 막힌 데다가 몸도 허약하여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강세황은 절망하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또 그의 처가로부터 물질적ㆍ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몸과 마음의 병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졌으며 우울증도 떨쳐 버릴 수 있었지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ㆍ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영조는 61살이 되던 해 그에게 생애 처음 영릉참봉(英陵參奉)이란 벼슬을 제수합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째인 하지(夏至)입니다. 이 때 해는 황도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는데, 그 자리를 하지점(夏至點)이라 합니다. 한 해 가운데 해가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기 때문에 북반구의 땅 위는 해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쌓인 열기 때문에 하지 이후로는 기온이 올라가 몹시 더워집니다. 또 이때는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하고, 곧 장마가 닥쳐오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일손이 매우 바쁩니다. 누에치기, 메밀 씨앗 뿌리기, 감자 거두기, 고추밭 매기, 마늘 거두고 말리기, 보리 수확과 타작, 모내기, 늦콩 심기, 병충해 방재 따위는 물론 부쩍부쩍 크는 풀 뽑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남부지방에서는 단오를 앞뒤로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무렵이면 모두 끝납니다. 감자가 많이 나는 강원도 평창에서는 하지 무렵 감자를 캐어 밥에다 하나라도 더 넣어 먹어야 감자가 잘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하짓날은 감자 캐 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가 지나면 감자 싹이 죽기 때문에 ‘감자 환갑’이라고 했으며, 이날 ‘감자천신한다’고 하여 감자를 캐어다가 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은 5월 26일(한국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로부터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한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심사 결과 세계유산 목록의 ‘등재 권고’를 통지받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 결정, 보존 상태 점검 등의 세계유산과 관련된 모든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무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국보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하는 단일유산으로, 국가유산청은 지난 2010년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이후 2024년 1월에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지요. 이후 서류와 현장실사 등 엄격한 심사 절차를 거쳐, 이번에 이코모스로부터 세계유산 ‘등재 권고’ 의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코모스는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해 ▲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주제를 선사인들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며, ▲ 선사시대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나 잡가를 일컫는 '서도소리'의 유지숙(국가무형유산 서도소리 전승교육사, 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이 서도민요와 서도 산타령 음반을 발매했다. 지난해 서도소리의 정수를 담은 대표 악곡인 ‘관산융마’와 ‘수심가’의 음반 발매 이후 서도소리의 전통 악곡들을 망라한 이번 음반은, 현전하는 서도소리의 충실한 기록을 담아냄과 동시에 유지숙 명창의 가장 완숙한 성음으로 현재의 서도소리 전승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남겨 그 값어치가 더욱 소중하게 평가된다. 서도소리는 남도소리, 경기민요와 다른 음계를 사용하고 음을 떨면서 내는 가창 기법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어, 서도소리를 내려면 '대동강 물을 먹어보고 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부르기 어려운 소리로 꼽힌다. 스승의 기록을 바탕으로 옛 노랫말들을 찾아내 가사와 함께 수록한 ‘서도민요’ 유지숙 명창 특유의 음악적 구성으로 서도소리만의 독특한 매력 더해 긴아리, 자진아리, 산염불, 배치기 등 모두 9곡을 담은 ‘서도민요’ 음반에서는 유지숙 명창의 스승인 고 오복녀(1913~2001) 명창의 가르침이 담긴 여러 기록을 살펴 그간 잘 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높이 7.6cm, 입지름 17.5cm, 바닥지름 6.2cm 크기의 국보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이 있습니다. 이 백자 대접은 입술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고 몸체의 옆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립니다. 대접 바깥 면에는 검은색의 가는 선으로 연꽃과 넝쿨무늬를 빙 둘러 장식했습니다. 대체로 모양새와 짜임새가 좋고 굽 깎음도 단정하며, 매우 세련된 품격을 보여준다는 평입니다. 이 대접은 중국 백자의 영향을 받은 단단한 경질(硬質) 백자와는 달리 고려백자의 흐름을 잇는 조선 초기 연질(軟質) 백자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상감기법(象嵌技法, 금속이나 도자기 등의 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거기에 금, 은, 자개 등 다른 재료를 끼워 꾸미는 기법)으로 무늬를 꾸민 조선시대 상감백자(象嵌白磁)입니다. 청자가 크게 유행했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가 되면 도자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그 중심이 옮겨갑니다. 유교 이념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은 임금의 그릇으로 백자를 골랐고, 순백의 백자는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자 말고도 상감백자, 청화백자(靑畵白磁), 철화백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깊이 몸을 웅크리고 끝없는 어둠 속을 걸었네 주님이 곁에 계신 줄 모르고 땅을 치면서 하염없이 울었네 곁에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무지함 속에서 원망했네 이기심 속에 사랑을 외면한 채 세상 길을 따라갔네 무대에서는 전통성악 정가의 가수 황정민ㆍ김용민이 이아람이 작사ㆍ작곡한 정가합창곡 ‘북천이 맑다커늘’ 주제에 의한 <그 사랑>(초연)을 (사)우리숨소리예술단-정가합창단과 함께 노래하고 있다. 어제 6월 14일 저녁 5시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사랑아트채플’에서 열린 사랑의교회 찬양부 주최, 사랑국악앙상블 주관으로 열린 제2회 사랑국악앙상블(단장 이진경) 정기연주회에서 있던 일이다. 교회의 찬송가를 가스펠 스타일도 아니고 전통성악의 정가 스타일로 부르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음악의 토착화라고 해야 할까? 기존 스타일의 찬송가를 부르던 성도들은 기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정감이 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연의 시작은 안준용이 작곡한 ‘관현악곡 천년만세 주제에 의한’ <할렐루가(歌)>(초연)로 시작한다. 사실 지난 2016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프랑스 시민들 앞에서 ‘천년만세’를 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 가운데 조선시대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쌍륙놀이’라고 합니다. 쌍륙(雙六)은 겨울철 특히 설날 무렵에 많이 놀았던 주사위 놀이로 악삭·쌍륙(雙陸)ㆍ상륙(象陸, 이두식 표기)ㆍ상육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쌍륙판(雙六板, 말판)과 서른 개의 말[馬] 그리고 두 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인 쌍륙은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말을 가는 놀이입니다. 혜원 신윤복(1758~?)의 ‘혜원풍속도첩’에는 '쌍륙삼매(雙六三昧)' 곧 '쌍륙놀이에 빠지다'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오른쪽 남자는 배자만 입고 탕건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있어 놀이에 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리고 오른쪽에 써놓은 시를 보면 “기러기 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라고 하여 이들이 상륙 삼매경에 푹 빠졌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쌍륙놀이는 신윤복의 그림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과 김시습(1435-1493)의 문집인 《매월당집》에도 ‘쌍륙’이란 제목의 한시가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인 심수경(1516-159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과 경주시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ㆍ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주 황남동 120호분 발굴조사 중 출토(2020년)된 금동관의 보존 처리 과정에서 비단벌레 날개 장식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금관을 포함해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관에서 비단벌레 날개장식이 확인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비단벌레 날개장식은 금동관 곳곳에 뚫은 구멍을 화려한 빛깔의 비단벌레 날개로 메워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단벌레 날개장식은 지금까지 모두 13곳에서 15장이 흡착과 흡수가 동시에 진행된 채로 발견되었는데, 금동관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붙은 날개장식이 7장이었고 나머지 8장은 관에서 떨어져 나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금동관에 그대로 붙어 있던 날개 장식(7장)은 출(出)자 모양 세움장식에서 3장이 겹친 상태였고, 나머지 4장은 원래의 위치에 한 장씩 붙어 있었지요. 현재 발견된 날개는 대부분 검게 변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원래의 빛깔이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동안 경주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쪽샘 44호 고분 등에서 출토된 말갖춤(馬具, 안장ㆍ발걸이ㆍ말띠드리개 등), 허리띠 등에 비단벌레 날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