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興到卽運意(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뜻을 움직이고 意到卽寫之(의도즉사지) 뜻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간다 我是朝鮮人(아시조선인) 나는 조선 사람이니 甘作朝鮮詩(감작조선시) 조선시를 즐겨 쓰리 위는 다산 정약용이 쓴 “노인일쾌사 육수 효향산(老人一快事 六首 效香山)”의 한시 일부입니다. 다산이 노인의 한 가지 즐거운 일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거사(香山居士) 곧 백거이(白居易, 중국 당나라 때의 뛰어난 시인)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1832년 지은 것이지요. 이 시는 “조선시선언(朝鮮詩宣言)”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의 시를 중국 문학의 예속에서 풀어내려는 다산(茶山)의 강한 주체의식(主體意識)을 드러냈습니다. 《조선시대 한시읽기(한국학술정보)》에서 원주용 교수는 다산이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 “성인의 법은 중국이면서도 오랑캐의 짓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의 짓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하니,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화이(華夷)의 개념과는 달리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적 권위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는데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지요.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로 기부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나라 밖에서 무기를 사서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운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박첨지] : 어흠 어흠, 아따 아닌 밤중 가운데 사람이 많이 모였구나. [산받이] : 아닌 밤중 가운데 사람이야 많건 적건 웬 영감이 남의 놀음처에 난가히 떠드시오. [박첨지] : 날더러 웬 영감이 난가히 떠드냐구. [산받이] : 그려. [박첨지] : 허 허 허 내가 웬 영감이 아니라. 내가 살기는 저 웃녁에 산다. [산받이] : 저 웃녁에 산다는 걸 보니 한양 근처에 사는가 보네. [박첨지] : 아따 그 사람 알기는 오뉴월 똥파리처럼 무던히 아는 척하는구려. 무대에서는 지운하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의 <박첨지 유람거리>가 펼쳐진다. 박첨지 인형을 들고나와 박첨지와 걸쭉한 그리고 배꼽 빠지는 재담을 들려주는 관객의 눈길을 꼼짝 못 하게 사로잡는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놀린다고 하여 ‘덜미’라고도 불리고, 박첨지놀음이나 꼭두각시놀음, 등의 말로도 불리고 있다. 어제저녁 5시 인천 부평구의 국악전용극장 ‘잔치마당’에서는 <유랑 예인의 하루, 춘몽(春夢)> 공연이 열렸다. 지운하 명인의 풍물 인생 70돌을 맞아 명인과 제자들의 한바탕 놀음판인 것이다. 흔히 사람이 70을 살면 노인이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국양금협회(회장 윤은화)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6회 국제양금음악제’에서 한국 전통악기 양금의 예술적 값어치와 독창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번 행사와 연계된 ‘2025 베이징 세계양금대회’에서는 한국 대표단이 최고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받으며 양금의 세계적 위상을 입증했다. 지구촌 무대에서 빛난 한국 양금의 진가 지난 8월 1일부터 5일까지 베이징 창핑구 양금가족민족악기박물관에서 열린 이번 음악제는 아시아 국가들이 참여한 대규모 축제로 치러졌다. 한국 대표단은 개막식과 폐막식 공연을 비롯해 단독 콘서트, 국제 콩쿠르, 학술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양금의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진행된 협회장들의 ‘민요 즉흥연주 협업 무대’에서는 윤은화 회장이 한국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연주하여 관객들의 큰 손뼉을 받으며 문화적 교류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양금협회와 청로국악기가 공동 연구로 제작한 전통양금이 세계 최초의 양금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박물관 내 특별 전시 공간에는 한국의 전통양금과 현대적 개량버전이 나란히 전시되어 전통음악의 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성 쌓는 곳에서 감독하고 일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사람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 먹은 사람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따로 한 처방을 연구해 내어 새로 약을 지어 내려보내니,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알 또는 반 알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 위는 《정조실록》 18년(1794) 6월 28일의 기록으로 정조 임금이 화성을 쌓는 공사장의 일꾼들이 더위에 지쳐 몸이 상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더위를 씻어준다는 ‘척서단(滌暑丹)’ 4천 정을 지어 내려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삼복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지난 지 이틀이 되었고, 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가 보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혹독한 불볕더위가 온 지구촌을 뒤흔들고, 밤에는 열대야로 잠 못 들게 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복지경(伏地境, 더위가 한창인 때)엔 자칫하면 열사병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가을이 시작된다는 24절기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이제 절기상으로는 가을철로 들어서는 때지만 아직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립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입하(立夏)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주었다.”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보면 입추까지 날씨가 무척 더웠고 더위를 얼음으로 겨우 버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고 하여 된더위에 고생한 것을 위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기사에는 “'입추' 무더위 여전‥. 주말, 남부 또 폭우 최대 120mm”라는 기사가 보입니다. 얼마 전에도 물폭탄으로 재산 피해는 물론 인명 피해까지 일어나 사람들은 불볕더위와 물폭탄으로 이중 고생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1769년) 7월 7일 기록에는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장마가 졌기 때문이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제(禜祭)’는 입추 뒤까지 장마가 계속되거나, 오랜 장마로 고통이 심한 때 날이 개기를 빌던 나라의 제사로 ‘기청제(祈晴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백행원(百行源)》을 몸소 지어 펴내도록 명하였다. 대개 사람의 자식으로서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갖추어 말한 것으로, 무릇 수천 자(字)가 되는데, 성스러운 마음으로 추모하여 지은 것이었다.” 이는 《영조실록》 106권, 영조 41년(1765년) 8월 6일 기록으로 조선후기 제21대 임금 영조가 백성들에게 효행을 권장하기 위하여 1765년에 쓴 책 《백행원을 펴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임금은 나이 72살 되던 해에 인간에게 있어서 효행은 온갖 행실의 뿌리임을 강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깨달아 실천에 옮기도록 권장한 글을 쓴 것이지요. 영조는 증자(曾子)의 《효경(孝經)》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 벗과의 질서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또 이 책은 한문본과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합본되어 있으며, 한자마다 음을 붙여놓았지요. 1책 21장의 얇은 책을 완성한 뒤 각 감영에 반포하였으며, 다시 각 감영에서는 이를 찍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문헌은 18세기 국어자료로서뿐만 아니라 영조가 무얼 바탕으로 백성을 대했는지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더위 그 까짓것 - 임인규 지독한 땡볕 측정온도는 38도씨 온몸에 땀이 줄줄 더위 그까짓 것 공사 현장 철근 위를 걸어봤니? 운동화 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온도 살이 익을 정도다. 그래도 공사는 해야 하고 그래야 돈을 번다. 섭씨 2000도 3000도를 오르내리는 용광로 앞에서 방열복 입고 쇳물을 퍼 날라 보았는가? 더위 그까짓 것 그래도 쇳물은 부어야 하고 그래야 수도꼭지는 생산이 된다. 우리 겨레는 더위가 극성인 때 혀끝에서는 당기는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뜨거운 음식으로 몸을 보양했다. 바로 그것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슬기로움인데 여름철의 더운 음식은 몸 안의 장기를 보호해 준다고 한다. 이 이열치열의 먹거리로는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실제로는 잉어와 오골계)으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 탕인 “임자수탕” 그리고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따위가 있다 여름철이면 사람 몸은 외부의 높은 기온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부 근처에 다른 계절보다 20∼30% 많은 양의 피가 모이게 된다. 이에 따라 체내의 위장을 비롯하여 여러 장기는 피가 부족하게 되고 몸 안의 온도가 떨어지는데, 이렇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의(영창대군)가 강화에 이르자 가시나무로 둘러놓고 지켰는데, 삼엄한 감시가 임해(臨海) 때보다 배나 되었다.” 이는 《광해군일기》[정초본] 69권, 광해 5년(1613년) 8월 2일 기록입니다. 1611년(광해군 3년) 영창대군에 봉해진 이의(李㼁),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대북 일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으로 자백하게 했고, 이에 영창대군은 폐서인(廢庶人)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 뒤 영창대군은 광해 6년(1614년) 3월 19일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영창대군이 죽은 까닭에 대한 문헌 자료는 두 가지로 나옵니다. 먼저 《광해군일기》 중초본 75권, 광해 6년 2월 10일 기록에는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펄펄 때서 죽였는데 방바닥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 죽었다."라고 나오며,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1625년) 3월 19일 기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독살하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서럽게 죽은 영창대군의 눈물은 비가 되어 음력 2월 9일 앞뒤로 내렸는데 이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잡절 삼복 가운데 중복(中伏)입니다. 여기서 복(伏)이란,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인테 복날에 유난히 공기가 가만히 정체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온통 폭염특보로 몸살을 앓습니다. 이런 날 우리 겨레는 삼계탕을 즐겨 먹었지요. 이때 삼계탕은 꼼짝하지 않고 있는 몸의 습을 불로 태워서 일부는 수분을 없애고, 일부는 순환시켜 주게 됩니다. 우리문화신문에 <한방으로 알아보는 건강상식>을 연재했던 유용우 한의사는 특히 닭고기만 먹으면 순환까지 이루어지지는 않는데, ‘인삼’이 있기 때문에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몸에 힘이 있는 사람들은 삼계탕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게 혈액순환이 되고 이때 똥오줌과 땀으로 나쁜 요소들을 방출하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부족한 사람이 삼계탕을 먹으면 오히려 몸이 더 늘어지기도 한다고 하지요. 이럴 때는 습을 기운으로 순환시켜야 하기에 ‘황기’가 필요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땀을 능동적으로 뿜어내는데, 힘이 없는 사람은 피부 표면이 땀을 능동적으로 배출하지 못하고, 삐질삐질 끈끈한 땀이 납니다. 이때 인삼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