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사람마다 모두 생일이 둘이라고 한다. 한 번은 자기의 탄생을 기리는 생일이며 또 한 번은 해마다 맞는 새해의 탄생이란다. 누구도 정월 초하루를 무심히 보내지는 않으며 여기에는 임금이나 구두 수선공이나 차이가 없다고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은 말한다. 말하자면 이날은 인류 공동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새해를 맞기 위해 서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동양에서도 제야의 종이 울린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지난 열두 달이란 기간 동안 내가 행했거나 당했거나, 이루었거나 등한히 한 모든 일을 순식간에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느끼는 진솔한 감정은 지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뭔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리라. “저물어 가는 한 해는, 구렁에 들어가는 뱀과 같아라. 긴 비늘 몸체가 반 넘어 들어갔으니, 가는 뜻을 그 누가 막으랴. 더구나 꼬리마저 말고 있으니 애써 봐야 소용없는 것을. 아이들은 잠들지 않으려고, 밤을 새며 웃고 떠드네. 새벽닭아 부디 울지 말아라. 제야의 북도 울리지 말아라.” - 소식(蘇軾)), '수세(守歲)'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다. 다들 시간의 빠름과 덧없음을 한숨으로 토해내고 있다. 올 한 해를 너무나 빨리 보냈다는 뜻이리라. 2019년, 올해 우리는 3.1만세운동 100돌, 임시정부 세움 100돌을 맞아 그 의미를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올해가 기미년이란 착각에 빠질 정도였는데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였다. 이 한 해 나라 전체로 보면 황금돼지의 후광을 조금도 받지 못한 듯 곳곳에서 경제가 안 돌아가고 생산과 소비가 엉망이라는 비명을 들어야 했다. 경제가 그리된 데 대한 원인 진단 또한 서로 달랐고, 특히나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너무 크게 일어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편안하고 윤택한 한 해가 아니었음은 누구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너나 나나 모두 후회 일색이지만 그 후회의 이면을 보면 우리가 우리 앞에 지나가는 이 시간에 대해서 주인이 아니고 종이나 노예가 되어,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맥없이 끌려간 게 아니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반성도 하게 된다. 그것은 언젠가 ‘걷기 예찬’이라는 책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이 지적한 대로 우리들의 시간을 잘 쓰지 못한 것 아니냐는 점에서 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지으려는 생각에 산에 들어가 재목을 찾아보았는데,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모두가 구불구불하게 비틀어져 용도에 맞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산 속 무덤가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앞에서 보아도 곧바르고 왼쪽에서 보아도 쭉 뻗었으며 오른쪽에서 보아도 곧아 보였다. 그래서 '좋은 재목이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도끼를 들고 그쪽으로 가서 뒤에서 살펴보니 슬쩍 구부러져 쓸 수 없는 나무였다. 이에 도끼를 내던지고 탄식한다. “아, 재목이 될 나무는 얼른 보아도 쉽게 알 수가 있어 고르기가 쉬운 법인데, 이 나무의 경우는 내가 세 번이나 다른 쪽에서 살폈어도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용모를 그럴듯하게 꾸미면서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말을 들어 보면 조리가 정연하고 그 용모를 살펴보면 선량하게만 여겨지며 사소한 행동을 관찰해보아도 삼가며 몸을 단속하고 있으니 영락없이 군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인데, 급기야 큰 변고를 당해 절개를 지켜야 할 때에 가서는 본래의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마니, 나라가 결딴나고 마는 것은 늘 이런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복잡한 도심을 떠나서 북한산자락으로 이사 온 지도 7년이 지나 벌써 8년째다. 우리집에서 언덕을 넘어서면 한옥마을이다. 이사 올 때에 허허벌판이었는데 2015년부터 한두 채 한옥이 시범적으로 들어서더니 지금은 한옥마을이 한옥 양옥으로 꽉 찼다. 사진을 비교해보면 그 변화에 눈을 의심할 정도다. 이 근처로 이사 온 것은 옛사람들이 즐기던 풍류, 곧 어지러운 속세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나 산 가까이에서 맑은 공기를 숨 쉬며 자연 속에 평온하고 건강한 삶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일대는 북한산이 바로 눈앞에 있고 크고 작은 계곡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곳이어서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묘사한 대로 “깊숙한 골짜기를 찾아가고 높다란 언덕을 거닐어 볼만한[尋壑經丘] 운치와 구름 따라 나갔다가 새들을 따라 돌아오는[雲出鳥還] 한가함을 즐길 수 있다.” 집 거실에서 가까이로는 작은 산등성이나 가파른 언덕, 조금 멀리로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푸른 소나무로 덮이고 군데군데 바위가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산의 힘찬 모습이 바로 보인다. 공자가 말했듯 “어진 이는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혀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가수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를 불러 더욱 유명해진 정지용의 시 '향수' 제2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차가운 겨울, 수확이 끝나 텅 빈 밭을 달리는 거센 밤 바람소리를 타고 고향의 겨울로 날아 들어간다. 확실히 차가운 공기, 센 바람, 길에 쌓인 눈,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시심을 자극한다. 시심은 시상(詩思), 또는 시상(詩想)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인데 요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리라. 이 시대의 시인으로 성가가 높아가고 있는 유자효는 이러한 시를 쓰고 싶은 생각, 문득 다가오는 순간적인 시의 방아쇠를 시마(詩魔)라고 부른다고 시를 모르는 우리 일반인들에게 알려준다. 시를 지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라는 뜻일 터이다. 중국 당(唐) 나라 때 재상 정계(鄭綮)는 시를 잘하였는데, 누가 묻기를 “상국께서 근래에 새로운 시를 지었습니까?”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시사(詩思)가 파교(灞橋)의 풍설(風雪) 속 나귀의 등 위에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얻으리오.”라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가랑비 정도로 생각했던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바뀌어 창밖을 계속 때리자 하루 종일 일이 안되고 시선이 계속 유리창 밖으로 돌아간다. 유리창에 부딪쳐서 깨어져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보면 마음은 어느덧 시인이 되어 누군가의 작품이라도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리움에 지친 얼굴 표정하나 없는 회색 빛 그게 너의 진실인가 봐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며 애타게 부르다 슬픔의 눈물방울 뚝뚝 떨구며 그렇게 넌 다가오고 있어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 .... 박명순/ '추우(秋雨)' 중에서 유리창을 때리는 비는 대개 말이 없다. 유리창으로 격리돼 있어서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 언어의 정지 속에서 느껴지는 말없는 가을비의 마음을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라고 하는 구절처럼 절묘하게 대변하면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런 가을비를 바라보노라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센티해지는 모양이다. 우수수 부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 자체가 마음의 빗장을 긁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기에 번잡한 세속을 피해 산 속에서 수양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나 홀로 길을 나섰네 안개 속을 지나 자갈길을 걸어가네 밤은 고요하고 황야는 신에게 귀 기울이고 별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네 길을 나서면 모든 게 경이롭다. 길을 가다보면 안개 낀 날도 있을 것이요, 무작정 가다가 날이 저물어 낭패를 보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문다고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그런 날이면 밤이 더 고요하고 황야는 바로 머리 위로 다가온 저 깊고 푸른 하늘에 거하고 있는 신(神)과 더 가까이서 대화할 수도 있다. 그런 날이면 별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 같다. 서로 얼굴과 몸매 자랑도 하고 정담도 나누고 때로는 거울로 햇빛을 얼굴에 쏘아주는 장난도 할 것이다. 사람을 뺀 모든 자연이, 그동안 말도 없이 숨어있던 모든 자연, 무생물이 이야기 한다. 밤을 걷는 사람들에게 걷는 일 자체는 이처럼 많은 경험의 보고이다. 이런 멋진 표현을 한 시인이 누구인 줄 아는가? 이 시는 ‘나 홀로 길을 나섰네’로 잘 알려진 러시아 음악의 노랫말이다. 스베틀라나라는 러시아출신의 프랑스 여성이 프랑스어로 불러 10년 전 우리나라에 유행했던 노래다. 단조로 된 쓸쓸한 멜로디, 그러기에 더욱 혼자 걷는 외로움을 잘 묘사하고 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배달은 박달과 통한다. 박달은 박달나무를 일컫는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단군(檀君)의 단이 바로 박달나무 단이니까 단군도 박달나무가 나는 곳의 임금이란 뜻이 된다. 실제로 박달나무 아래서 나라를 열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박달나무의 박달은 한자로 ‘朴達’, 또는 ‘백달(白達)’, 그러다가 ‘배달’.... 이렇게 이어지지만 굳이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에 박달은 '밝은 달'이란 순수 우리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박달나무를 본 적이 있으신가? 사전을 보면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깊은 산 속에서 30미터 높이까지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북동부, 그리고 러시아 우수리 지방 등에 사는 곳으로 되어 있어 우리 겨레의 거주범위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 겨레를 배달겨레, 곧 박달 민족이라고 해서 크게 틀리지 않는다. 박달나무는 무척 단단해서 예전에는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방망이나 윷, 방아와 절구공이, 떡살판, 다식판, 수레바퀴 등 생활 주변 곳곳에 쓰였다. 그런데 박달나무를 이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나무가 단단한 만큼 빨리 자라지 않는데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벌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대체로 독일어라는 것은 딱딱하고 정감이 없는 개념어 일색이란 비판을 듣지만 때로는 매력이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 언어도 중국의 한자와 비슷한 구성법을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Fernseh’라는 단어가 있다. ‘fern’은 멀다(遠), ‘seh’는 보다라는 뜻의 동사 ‘sehen’에서 나온 말로 ‘봄(視)’ 이란 뜻이니까 이 단어는 멀리서 보는 것이란 뜻의 텔레비전이 된다. 중국에서는 전기를 통해 멀리서 볼 수 있는 것이란 뜻으로 電視(전시)라는 말이 텔레비전의 번역어로 쓰인다. 같은 원리로 ‘Fernweh’가 있다. ‘weh’는 ‘불다, 전달하다’라는 뜻의 ‘wehen’에서 나온 말이니까 멀리 전달되는 그 무엇, 곧 ‘동경(憧憬)’이란 뜻이 된다. 그러면 ‘Fernweh’는 먼 데에 대한,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란 뜻이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유명한 여성 수필가 전혜린의 ‘먼 곳에의 그리움’이란 글이 생각이 나서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