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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동지 팥죽, 그리고 천기

동지, 새롭고 편안하고 안전한 한반도를 위한 변화의 기점이 되기를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7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동지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동지라 하면 팥죽을 생각하게 된다. 팥죽이라고 하니 서울에서 송추로 가는 도봉산 오봉 기슭 석굴암의 팥죽 전설이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인 1792년, 당시 석굴암에는 노스님과 동자승 단둘이서 살았는데 그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끊기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 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 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 씨 부인 파평 윤씨가 인기척에 놀라 부엌 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 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느냐?"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라고 대답했다. 차 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 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은 차 씨 부인은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차 씨 영감에게 부인이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차 씨 영감은 혹시 동자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았지만 눈 위에는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후 눈이 녹은 뒤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오니 차 씨 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들은 노스님은 며칠 전 동짓날 사시에 예블을 드릴 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 것이 떠올라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황망 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드렸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석굴암에 전해오는 ‘동지 팥죽’ 전설이다.

 

 

 

우리 모두 알듯이 동지는 한 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한자로는 ‘冬至’라 쓰는데, 겨울이 왔다는 것인가? 아니면 겨울이 극에 달했다는 뜻인가? 요즘 추위를 생각하면 겨울이 왔다는 듯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길어지던 밤이 동지 이후 다시 짧아지는 것을 보면 겨울이 극에 달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한다. 동양의 음양사상으로 보면 밤은 음(陰)이고 낮은 양(陽)이다.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음이 가장 극에 달한다는 것, 그러다가 이날을 계기로 낮, 곧 양이 다시 길어지므로 겨울이 극에 달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냥 낮의 길이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동지야말로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동양의 《역경(易經)》에서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동지의 괘를 복괘(復卦)로 삼았다. 복괘라고 하면 맨 밑에 막대기 하나가 있고 그 위로 중간이 터진 막대기 다섯 개가 나란히 위로 쌓여있는 괘인데, 그 모양에서 보듯 꽉 찬 음(陰)을 뚫고 막 양(陽)이 자라기 시작한 형상이다. ‘복(復)’은 ‘돌아온다’라는 뜻인데, 본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에서 극에 달하면 아래로 돌아와 다시 생한다’라고 하는 역리(易理)에 근거한 것으로 나무 열매 속에 들어있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상황으로 비유될 수 있다.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동지가 있는 11월, 곧 동짓달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다. 그런데 태양력은 동지 뒤 8~9일이 있어야 새해가 되며 음력은 보름 정도 있어야 새해가 되니, 그것은 밤낮의 길이만으로 보면 동지가 분기점이지만 계절이라던가 추위, 하늘 기운의 성장 등을 감안하면 동지에서 며칠이라도 지나가야 새해로 계산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런 정도야 우리가 상식으로 알 수 있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말 중에 동지를 ‘천근(天根)이라고 한다.’라는 것이 있다. 원래 동지는 영어로는 ‘Winter Solstice’라고 해서, 해가 가장 남쪽에 가 있다가 다시 북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 잠시 정체되는 극점을 의미하는데, 천근이라고 할 때는 ‘the Heavenly Phallus’라고 해서 하늘의 기운이 남성의 성기가 뻗치는 것처럼 뻗쳐오르는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 해가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복(復)’과는 같은 개념인데 이것을 천근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역경(易經)》에서 괘를 살필 때는 안과 밖, 두 개의 괘를 아래위로 쌓아놓고 살피는 것인데, 복괘는 내ㆍ외괘로 보면 땅속에 우레가 있는 모습으로 음력 10월, 음(陰)이 극성한 때를 지나 11월 동짓달 첫 양(陽)이 처음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1년 가운데 가장 추운 동짓달, 얼어붙어 있는 지표(地表) 아래에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괘는 곧 천지의 마음이 드러나는 때라고 하겠다.

 

 

동지를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아서, 동양에서는 동지를 흔히 ‘亞歲(아세)’, 곧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말이 전해왔다,

 

서양에서는 성탄절이 동지축제를 대신하고 있는데, 신약성서에 예수가 탄생한 날짜가 나오지 않는데도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리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Mithraism)의 동지 축제일이나 태양 숭배의 풍속을 이용해서 예수 탄생을 기념하게 한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천문학적으로 보면 동지가 되면 해가 방향을 틀기 위해 사흘간 멈춰 있다가 사흘 뒤인 12월 25일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므로 이날을 예수탄생일로 기린다는 것이다. 동지라는 시점은 이렇게 천체의 운행, 우주의 기운을 한해라는 단위로 볼 때 새로운 기운이 시작되는 기점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동지는 곧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9년 전 동지에는 뜻밖의 소식이 날아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북한 김정일의 사망이다. 아버지 김일성이 1994년 갑자기 죽은 이후 17년 동안 북한을 통치한 김정일 때 우리가 사는 남쪽에 갖가지 위협과 도발이 있었고, 북한 동포들이 굶주림에 죽어 나간 것 등으로 해서 우리 가운데는 그를 악의 축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김정일이 사망한 것이 마침 동지를 4~5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에 우리 가운데는 북한이 2011년 동지라는 시점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기대를 해왔고, 그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남북한이 만나고 미국과도 만나서 한반도의 적대관계 종식과 남북화해의 기운이 무르익었지만, 다시 답보상태가 된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바이다. 최근 미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도 새 정권에 맞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렇다면 올해 동지를 맞아 또 한 번의 전환이 북한에 올 수는 없을까?

 

내년이면 김정은 출범 10주년이어서 그러한 변화의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올해 동지는 그러한 또 하나의 대변화의 기점, 새롭고 편안하고 안전한 한반도를 위한 변화의 기점이 되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석굴암의 나반존자가 엄동설한에 있는 우리나라에 불씨를 지펴주어 남북한 따뜻한 팥죽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이적을 다시 보여주실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