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셨다.
나를 다독이시고 나를 기르시며, 나를 자라게 하고
나를 키우시며, 나를 돌아보시고 나를 다시 살피시며,
출입할 땐 나를 배에 안으셨다.
이 은혜를 갚으려면 하늘처럼 망극해 한량이 없구나.
父兮生我 母兮鞠我 拊我畜我 長我育我
顧我復我 出入腹我 欲報之德 昊天罔極”
...《시경》 〈육아(蓼莪)〉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올해로 혼인 70주년을 맞았다. 거꾸로 세어보면 625동란이 나던 1950년 초겨울에 혼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신 것이다. 두 분이 혼인하실 당시 아버지는 집의 나이로 18세, 어머니는 한 살 위인 19세셨다. 문경 주흘산 동쪽 계곡의 너른 분지의 윗동네에 사는 할아버지와 아랫동네에 사는 외할아버지가 서로 친구분이신데 두 분이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맺어 주셔서 부부가 되고 두 분이 자녀를 3남 2녀를 낳아 그 밑에서 이제 손자 손녀 10명에 우선 증손주 8명이 태어나 자라고 있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 늦가을 초겨울이라서 올해 혼인 70주년을 맞아 생신축하 겸 성대한 기념 축하연을 열어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하나 식구들이 모두 한데 모이다가 혹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때에 어린 증손주 들이라도 잘못되면 큰일이므로 두 분이 극구 말리셔서 아주 간소한 축하자리에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들만 모여서 치르기로 했다. 잔치를 크게 열어드리지 못하는것 뿐 아니라 늙으신 부모님의 가장 큰 재미가 증손주들 크는 것을 직접 보고 격려해주는 것인데 이것마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아쉽지만 어이하겠는가?
두 분의 삶은 힘듦의 연속이었다. 혼인하신 게 전쟁이 막 일어나고 몇 달 뒤이고 첫째로 누님이 태어나신 것이 그 다음해 여름, 또 내가 태어난 것이 전쟁이 막 끝났지만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1953년 가을이며 이 때에 아버지는 고등학생이었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충북 옥천의 학교에서 교편을 시작하셨으니 그동안 생활이 어떠하셨겠는가? 그 많은 고생의 삶을 일일이 더듬는 것도 힘드실 것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만 그런 고생을 하신 것은 아니고 당시를 살아오신 많은 분이 다 그렇게 힘이 드셨지만 어쨌든 고생고생하셔서 다섯 자녀를 키워내신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는 비가 온 길을 걷다가 넘어지셔서 다리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으셨고 그보다 먼저 아버지는 대장암을 이겨내셨는데, 그런 두 분이 지금은 큰 병은 없으면서 같이 지내신다. 커오면서 그런 과정을 겪고 지켜본 큰아들로서는 두 분의 혼인 70년이 정말로 기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혼인 60주년을 아주 큰 경사로 생각하고 자손들이 두 분을 성대하게 모신다.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도 다 모셔서 축원을 드린다. 회혼례라고 한다. 그런데 10년 전 60주년 때 이런저런 까닭으로 회혼례를 제대로 모시지를 못했고 이번에라도 모시려고 했지만 뜻밖에 온 세계가 고약한 질병에 휩싸이게 되어 그것도 약소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된 것이다. 정말로 마음과 달리 어쩔 수 없는 불효가 되는 상황이다.
두 분의 연세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세는 방식으로 아버지 88세, 어머니 89세이니 두 분은 어쨌든 수를 하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다행히 두 분이 건강하셔서 어디나 기시고 싶으면 걸어 다니시고 일도 하시니 자식으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연세를 더 할 때마다 수를 하시는 것이 좋은 만큼 앞으로 더 사실 날이 그만큼 짧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야말로 《논어》 〈이인(里仁)〉에
“부모의 연세를 모르고 있을 수는 없나니, 한편으로는 오래 사셔서 기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라는 공자의 말 그대로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두 분이 살아계실 때 효도를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점잖게 말 하시는 분들이 있다. 옛사람들이 행한 효도 가운데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 이유(怡愉, 마음이 기쁘고 즐거움)일 것이다. 어버이를 옆에서 모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다. 이때 하는 것이
“새벽에 어버이에게 아침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며, 해가 뜨면 물러나 각자 일에 종사하다가, 해가 지면 저녁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린다.〔昧爽而朝 慈以旨甘 日出而退 各從其事 日入而夕 慈以旨甘〕” ....《예기》 〈내칙(內則)〉
는 것이다. 그런데 변명이지만 현대라는 사회가 되어서 부모를 가까이에서라도 모시지 못해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음식을 해올리지를 못하고 있어 옛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다. 그렇다고 자주 찾아뵙는 것도,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리는 것도 제대로 안한다. 마음이 게으른 탓이다. 그러니 자식된 마음에 늘 송구하고 죄송한 것이다.
아무튼 두 분이 크게 벌리는 것을 반대하신다는 핑계로 고민을 하다가 식사로 줄여 모시는 자리에 걸개를 하나 마련했다. 걸개에는 이런 문구를 넣었다;
"이봉기 임계상의 아름다운 70년-
만남과 이룸을 경하드리고
더 멋진 미래를 축원합니다."
두 분, 자손들의 절을 받으시다.
서양에서는 혼인 60주년을 다이아몬드(금강석)혼식이라고 기리고 70주년은 백금혼식이라고 기린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60주년을 회혼연을 열어드리지만 70주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특별한 수식어 없이 두 분이 만나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녀를 낳고 키워서 오늘날 사회에 그래도 많은 활동을 하도록 한 그 이룸, 그리고 이제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멋지게 가꿔가시라는 뜻을 단촐하게 담아보았다.
조선 조 중종 명종 때 문신인 농암 이현보는 말년에 고향 안동의 낙동강의 지류인 분강(汾江)으로 내려가 작은 당(건물)을 짓고 당호(堂號:집 이름)를 애일당(愛日堂)이라 지었다. 나이 90세를 넘긴 노부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이 세상에서 오래 가질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효자는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동안 하루하루를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
라는 말을 했는데 ‘애일’이란 말은 늙으신 부모의 하루하루가 참 애틋하다는 뜻이고 조선시대에는 이 말이 노부모를 위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여 왔다. 부친의 나이가 94세였던 1533년에 농암은 고을의 노인 9분을 초대했는데 이분들의 연세를 모두 합하면 740세, 평균 82.2세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농암은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춰 부친을 비롯한 노인들을 즐겁게 해 드렸단다. 그렇게는 못 했지만 두 분이 끝나고 기분이 좋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한다.
우리가 효도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제대로 안 하고 못 해 드리다가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신세라는 탄식(풍수지탄: 風樹之嘆)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고 나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떨어져 사는 아들은 평소에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부모님 생각에 잘 넘어가지를 않는다.
옛사람들은 어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과 물질적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효도라고 하는데 물질이야 요즈음에는 크게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출입이 여의치 않으시니 아침저녁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제대로 해서 드시는지 걱정이다. 자식들은 이제 더 부모 속을 썩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제 두 분은 미수(米壽)에 구순(九旬)에, 백수(白壽)에, 백수(百壽)를 넘겨서 맹자가 말한 기이(期頤)의 복(100년의 수명을 누리면서 자손의 봉양을 받는 것)을 기어코 받으시기를 자식들은 축원한다. 두 분의 혼인 70주년을 축하드리고 건강을 잘 유지하셔서 지금보다 더 기쁘고 멋진 미래를 맞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