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양력설을 쇠는 일본은 지금 귀성인파로 전국 고속도로가 극심한 정체를 겪고 있다는 보도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고향의 부모님과 일가친척을 만나 뜻깊은 새해를 맞으려는 것은 우리네 설날 풍경과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에는 없는 하츠모우데(初詣)란 풍습이 특이하다. 하츠모우데는 새해 정초에 신사나 절에서 한 해의 소원성취와 건강을 비는 행사를 말한다. 이맘때쯤이면 인터넷에서는 전국의 유명한 신사나 절을 소개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일본의 정초 하츠모우데 풍습은 “도시코모리(年籠り)”라고 해서 집안의 가장이 기도를 위해 그믐날 밤부터 정월 초하루에 걸쳐 씨신(氏神の社)의 사당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던 것이 그믐밤 참배와 정초참배로 나뉘어졌고 오늘날에는 정초 참배 형태가 주류다. 이러한 정초 기도 풍습은 명치시대(1868년) 중기부터 유래한 것으로 경성전철(京成電鐵) 같은 철도회사가 참배객 수송을 대대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이동이 쉽지 않던 사람들이 철도를 이용해 유명한 신사나 절을 찾아다니게 된 것이다. 대개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신사나 절에서 하츠모우데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전국의 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그 마지막인 제6편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들 가운데 여성들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남성들 못지않게 이들의 활약과 비중은 작지 않았다. 모두 6편으로 살펴본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들이다. 1910년대 처음 만주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우락, 박순부와 같은 1세대 여성들, 1920년대 무장투쟁에 직접 뛰어든 남자현과 같은 여성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만주에 정착하여 반평생을 후방에서 항일투쟁을 지원했던 허은, 이해동과 같은 3세대 여성들 모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이다. 오늘 살펴볼 마지막 주제는, 3세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동북항일연군과 같은 무장단체 소속되어 직접 무기를 든 여성들이다. 1930년대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일제와 맞서 싸운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배성춘, 김노숙, 이근숙은 경북 출신의 대표적인 항일 여성투쟁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듣도 보도 못한 감염병 ‘코로나19’가 올해로 끝나는가 싶었더니 또다시 극성이다. 이 녀석이 아니라면 성탄분위기를 살린 크리스마스트리나 캐럴송도 제법 들릴 텐데 아예 거리에 나서는 일조차 꺼리는 연말 분위기다. 그래도 대형쇼핑몰이나 백화점 등에는 커다란 트리장식이 내걸려 한해를 마무리하는 느낌을 준다. 연말이 다가오면 일본에서는 “시메카자리(注連飾り)”를 대문에 건다. 시메카자리는 집 대문에 매다는 장식으로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운을 멀리하려는 뜻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다. 이러한 전통은 농사의 신(도작신앙-稻作信仰)을 받드는 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도(神道)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일본의 나라신(國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시메카자리는 짚을 꼬아 만든 줄에 흰 종이를 끼워 만드는데 요즈음은 백화점이나 편의점 따위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 시메카자리는 보통 12월 말에 대문에 내걸고 대개 1월 7일 이후에 치우는 게 보통이지만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다. 관서지방에서는 1월 15일에 치우고, 미에현(三重縣 伊勢志摩) 같은 지방에서는 1년 내내 장식하는 곳도 있다. 시메카자리 말고 연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유일한 생존 여성독립운동가인 오희옥(95세) 애국지사의 ‘독립유공자의 집’이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설립 예정으로 헐릴 위기에 있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줄기차게 보도되고 있지만, SK하이닉스측에서 이에 관한 협상을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의 성금으로 조성된 ‘독립유공자의 집’을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용인시(백군기 시장)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일은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사)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구, 한국광복군동지회) 이형진 회장의 이야기다. 어제(20일) 낮 1시, 기자는 전쟁기념관에 있는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오희옥 애국지사의 아드님인 김흥태 선생도 함께했다. 제17대 회장에 취임(10월 18일)한 지 두 달 남짓이라 그런지 아담한 크기의 사무실에는 책상과 소파 등 몇 가지 기본 집기들만 있을 뿐 썰렁했다. “소파 등도 모두 중고 물품입니다. 제가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근 10년간 광복군동지회는 개점휴업 상태였습니다. 1965년 9월 15일 ‘대한민국의 뿌리 한국광복군동지회’를 창립할 때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다문화 공생의 거리, 도쿄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이 개관한 지 12월 7일로 20주년을 맞이했다. 설립을 위해 힘을 모았던 <고려박물관을 만드는 모임(高麗博物館をつくる会)>으로부터 따지면 31년 째다. 개관 2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는 지난 8일부터 “개관20주년기념기획전”을 열고 있다. 이번 기획 전시를 앞두고 지난 11월 27일에는 ‘고려박물관의 원점에서 다음의 20년을 생각한다(高麗博の原点から、次の20年を考える)라는 주제의 개관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강사는 아라이 가츠히로(新井勝紘) 고려박물관장이 맡았고 부제로 ’작은 박물관이야말로 매력있는 전시(小さい博物館だからこその魅力ある展示)’ 의 장점을 살리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작지만 알찬 전시 내용으로 정평이 나있는 고려박물관은, 사실 크기만의 문제가 아닌 진짜 중요한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것은 고려박물관의 설립 목적에도 잘 드러나 있다. 고려박물관 설립 목적을 보면, 1. 고려박물관은 일본과 코리아(한국·조선)의 유구한 교류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며,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 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이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의 좌우명 ‘세독충정(世篤忠貞)’의 글귀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국한 고경명(1533∼1592) 의병장의 비각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에 야산에 있다. 초겨울 날씨지만 이른 아침에 찾은 비각으로 오르는 산기슭은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아침 이슬까지 머금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비각을 세운 이 일대가 고경명 의병장이 왜군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곳이라니 땅을 밟는 것조차 숙연해진다. 현재의 비각은 효종 7년(1656) 고경명 의병장이 순국한 뒤 이곳에 세웠는데 일제침략기인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파괴된 것을 후손들이 조각난 비각 파편을 모아두었다가 1962년에 지금의 석조비각(石造碑閣)을 건립한 것이다. 금산군의 일제강점기 때 비각 만행 장소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 고경명 선생 비각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천년 고찰 보석사(寶石寺)가 그곳이다. 만행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보석사 입구에 서있는 의병승장 영규대사의 비석이다. 의병승장비는 1592년(선조25) 8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5편은 망명한 독립운동가 3세대라 할 수 있는 허은과 이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부터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허은과 이해동 등은 만주망명 1~2세대에 의해 민족의 대들보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국땅에서 자라면서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조국 독립을 열망하였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견딘 ‘허은’ 여사 허은(1907~1997)은 1907년 1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범산(凡山) 허형(許蘅, 1843~1922)이며 재종조부로 방산(舫山) 허훈(許薰), 성산(性山) 허겸(許蒹), 허위(許蔿) 등이 있다. 모두 당대 의병을 이끌거나 부민단을 조직한 독립지사들이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으로 일제 치하에서 항상 감시와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2년부터 순차적으로 만주 망명을 떠났고 1915년 9살 어린소녀였던 허은도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 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간도(만주지역)라고 하면 ‘일제 침략기에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지던 곳’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기자 역시 간도에 대한 인상은 이 이상을 넘지 못했다. 특히 이 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갖고 있던 ‘간도’에 대한 이미지를 일찌감치 털어버린 사람이 있다. 바로 사진작가 류은규 씨다. 류 작가는 한중수교 무렵부터 지금까지 약 30 여년에 이르는 동안 중국 동북삼성 곧 간도 전역을 찾아다니며 중국동포(조선족)들을 촬영했다. “자기가 찍은 사진만이 사진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의식을 갖고 오래된 사진을 후대에 넘겨주는 것 또한 사진가의 임무이자 역사에 대한 책무라고 봅니다. 개인의 기록이 정리되면, 자료가 되고, 자료가 모여 시간이 흐르면 사료(史料)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동포들이 갖고 있는 자료사진이나 기념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듣고 보니 그렇다. 평소 사진가란 자신의 작품을 남기는 것이 전부라고 여겨왔던 생각이 류 작가의 이 말에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한 가지 의구심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신궁 낙성식때 참석한 뒤 “화려했지만 왠지 쓸쓸한 모습” 이라고 낙성식 참석 소감을 촌평한 신도학자(神道学者)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일본 신사지만 조선신(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일본신사에 단군을 모셔야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용면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조선의 조상인 단군을 모시려면 단군사당을 지어서 모셔야하는 것이지 왜 일본신사를 지어 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라는 이론으로 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 1871~1939) 같은 학자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은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같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밑바닥 정서는 일제의 조선식민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인에게 강요된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말살정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4편은 영화 ‘암살’에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걸 ‘안옥윤’ 역할의 모델이 되었던 남자현 지사의 무장독립투쟁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남자현 지사는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8년의 기간은 주로 후방에서 교육과 생활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 계획을 수립한 1927년부터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만주전역에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던 시기였다. 더욱이 여준, 지청천과 같이 독립을 이끌었던 인사들의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때였고 이상룡이 사망도 겹쳤기 때문에 동포사회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국에서 국제연맹이 만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만주침략을 조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자현 지사는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라 여겨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기로 하였다. 남자현 지사는 하얼빈의 한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조선(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