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격렬한 투쟁성을 지녔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나라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기 전부터 대대적으로 일어난 의병전쟁 등이 있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만주 등지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는 등 해방되기까지 꾸준히 무장독립투쟁의 맥을 이어갔다. 이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의열투쟁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 온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 독립의 대의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무력적 투쟁이다. 이러한 인류공영의 투철한 목적성을 토대로 진행된 의열투쟁이 단순히 개인 또는 일부 집단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자행한 테러와 명확히 구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난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 1884~1928) 의사(義士)는 반평생을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열투쟁에 헌신한 독립투사다. 그는 팔련오계(八蓮五桂)로 유명한 풍산김씨 오미마을의 명문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집안 숙부인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 1845~1914)에게 한학을 공부했다. 김병황은 당시 한학자로서 명망이 높았고, 의병이 일어날 당시 풍산김씨 문중을 대표하여 의병을 지원하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울긋불긋 단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단풍이라 하면 일본도 그 어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명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이맘때면 앞다투어 단풍 명소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많다. 코요 월커 플러스(koyo.walkerplus)의 경우에는 단풍명소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1)지역 중심으로 찾기 2)전국 단풍 랭킹으로 찾기 3)지금 가장 볼만한 명소로 찾기 4) 가까운 시일내에 볼만한 곳으로 찾기 5) 지난해 11월, 아름다웠던 곳으로 찾기 등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전국단풍명소랭킹’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랭킹 1위는 도쿄 다치가와시(立川市)에 자리하고 있는 국영소화기념공원(国営昭和記念公園)이다. 이 공원은 소화(昭和)왕 재위 중인 1983년에 설립한 공원으로 ‘보고, 놀고, 먹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으며 4계절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공원 안에는 소화천황기념관도 조성되어 있다. 2위는 기후현 다카야마시(岐阜県高山市)에 있는 히다미노개울가도(飛騨美濃せせらぎ街道)이다. 히다미노지역은 64km 길이의 드라이브 코스로 참나무, 너도밤나무, 낙엽송 등 활엽수가 황금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10월 28일 “기암 이중업의 학문과 독립 활동”의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 행사는 지역의 숨은 역사 인물들의 삶과 학문을 재발견하기 위해 안동시의 지원으로 매년 개최되는 역사인물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금년은 문봉 정유일 학술대회에 이은 두 번째이다. 기암 이중업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경술국치 후 일제의 통치를 항거하며 단식을 시작한지 24일 만에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5년 아버지가 을미의병을 일으키자 격문을 지어 독립운동을 확산시켰으며 향산의 아우인 유천 이만규와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올해는 기암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학술대회에서는 기암 이중업의 학문과 독립 운동뿐만 아니라 향산의 아우인 유천 이만규의 학문과 독립 운동 및 일가의 독립 활동에 대한 주제로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였다. 3대 문과 급제 3대 독립운동 가문 퇴계선생을 잇는 기암 이중업의 가문은 증조 이가순(1768-1844), 조 이휘준에 이어 부 향산 이만도까지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과 한국의 문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인상 깊은 것 하나를 들라하면 ‘결혼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르는 법 제도’이다. 일본은 예컨대 다나카(田中) 성씨의 여성이 나카무라(中村) 성씨의 남성과 결혼을 하면 나카무라(中村)로 바꾸는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물론 자녀가 태어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그러니까 남편의 성씨를 부인과 아이들이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김(金)씨 성의 여성이 이(李)씨 성의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성씨는 변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볼 때 이러한 한국 여성들의 ‘고유 성씨 유지’가 어떻게 비쳐질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 해답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일본에 있을 때 이름하여 ‘부부별성제도(夫婦別姓制度)’라는 주제의 티브이 토론을 종종 목격한 적이 있다. 부부별성제도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결혼 전까지 사용하던 성씨를 남편 성으로 바꿈으로써 야기되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웃나라인 한국 여성들은 부부가 각각의 성씨를 쓰지 않는가?” 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부부가 각각의 성씨를 쓰면 가족 구성원 간의 결속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총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2편은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가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시기를 조명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따라 일가족과 함께 고난의 길에 동참한 여성들은 종속적인 삶을 살았던 전근대 여성의 모습을 넘어 주체적으로 만주의 한인 사회를 안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들이야말로 만주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 만주에 정착한 독립운동가들은 군대를 양성하여 일본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전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만주 지역 동포 사회의 경제적인 안정, 둘째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기구 조직, 셋째 민족교육기관의 설치와 교육 활동, 넷째 군사양성시설인 병영의 설치를 주도했다. 이들 활동에 여성들 역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만주지역 동포사회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생존의 근간이 될 안정적인 농업 경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사히신문에서는 지난 9월 6일부터 10일까지 모두 5회에 걸쳐 한국관련 기사를 연재했다. 그 주제는 '이웃나라의 언어' 였다.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회: 조선어인가 한국어인가 요동쳤던 강좌명 (2021.9.6.) 제2회:현장에서, 50년전 결심하고 배운 시민 (2021.9.7.) 제3회:현장에서, 일본과 한국을 연결한 두명의 시인(2021.9.8.) 제4회:현장에서, 괴롭고 씁쓸한 모국어의 추억 (2021.9.9.) 제5회:현장에서, K pop에 빠진 젊은이들 (2021.9.10) '이웃나라의 언어'라는 것은 곧 한국어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한국어'라고 맘대로 부르기가 어렵다.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대한민국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국어'에는 북한이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북한어는 어디까지나 '조선어'다. 남과북으로 갈리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아사히신문에서는 5회나 걸쳐 지면을 할애하여 '한국어(조선어)'를 다뤘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만이 아닌 것으로 언어를 매개로한 '인물, 문화,역사'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깊다. 오늘은 제5회 연재분을 소개하겠다. 그런데 오늘 소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2021년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와 그 집안이 독립운동을 위해 이국땅인 만주로 망명길에 나선지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총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1편은 석주 이상룡의 아내로 독립에 대한 진취적 의식을 드러낸 김우락(金宇洛, 1854 -1933) 을 조명하였다. 조선에 그대로 남아 일제에 협력했다면 자신들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고 어쩌면 자손들까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나라를 잃고 몸을 편히 쉴 수 없다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갔다. 척박한 만주 벌판에서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들은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고 함께 건너간 동포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경북 지역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자 솔선하여 의병활동과 척사상소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내앞마을의 백하 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교보문고라든지 영풍문고 같은 오프라인 서점엘 가면 외국어 코너가 있어서 다양한 학습 교재를 고를 수 있다.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어일 것이다. 그 다음은? 글쎄다. 일본어나 중국어? 아무래도 이웃나라인 이 두 나라 언어가 2,3위 자리를 다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할까? 9월 6일치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서점에서 1위는 영어이고 그 다음이 ‘한국 · 조선어’ 코너라고 한다.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 · 조선어’ 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국어면 한국어지 ‘한국 · 조선어’는 뭐야? 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하겠다. 안타깝게도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쪽은 국호가 대한민국이고, 북한은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러한 이름을 각기 갖고 있지만 남한(대한민국) 사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북한’이라고 흔히 부른다. 분단 이전에는 원래 한겨레요, 언어도 같은 언어 공동체였다. 그러나 분단이 길어지면서 언어의 이질화도 생겨 ‘북한말’, ‘남한말’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인데 그 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쓰는 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황족(皇族)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지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황족 출신의 마코(眞子, 30) 공주 결혼을 앞두고 연일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결혼 상대자는 고무로 케이(小室圭. 30) 씨로 이들은 10월 26일 결혼을 앞두고 있다. 마코 공주는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로 이들의 결혼에 대해 일본 국민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다. 마코 공주는 지난 2017년 9월, 대학 동창인 고무로 케이 씨와 약혼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약혼 발표 이후 주간지 등에서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의 어머니가 돈 문제로 시끄럽다고 보도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몰아갔다. 일부 언론에서는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가 마코 공주의 일시금(여성 황족에게 주는 왕실 세금)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마코 공주는 일시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9월 27일, 약혼자 고무로 케이 씨가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올해 7월, 미국 뉴욕주에서 사법시험을 치렀고 합격이 예상되어 뉴욕주의 법률 사무소에서 취직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제 마코 공주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큰 스님, 종수 스님<1922.12.20.~2020.12.19(음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우연이라고는 했지만 ‘사찰순례’를 하다보니 언젠가는 만날 법한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한가위를 앞두고 부모님 묘소(전북 전주)에 성묘하러 간 김에 주변 지역의 사찰순례를 하곤 하는데 올해는 전남 무안에 있는 용덕사(龍德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덕사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에 있는 절이다. 길찾개(네비게이션)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따라 절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끝에서 시작되는 절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공덕비 하나가 근사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고 종수당(宗秀堂)이라는 작고 아담한 부도탑도 곁에 있었다. 찬찬히 공덕비문을 읽고 절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나중에 볼 요량으로 먼저 절 경내로 들어섰다. 대개 지역에서 이름난 절이 아닌 경우, 절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 대부분인데 용덕사는 아담한 규모의 절이었지만 꽤 짜임새 있는 가람을 갖춘 절이었다. 용덕사가 비구니 스님 절이라는 것을 안 것은 경내를 분주히 오가던 비구니 스님을 보고서였다. 절을 찾은 날은(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