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관광두레는 지역 주민이 직접 숙박, 식음, 기념품, 체험, 여행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 고유의 특색을 지닌 관광사업체를 창업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정부가 사업체의 발굴에서부터 사업화 계획, 창업과 경영 개선까지 현장에서 밀착 지원을 하는 정책 사업이다. 지난 2013년 8월부터 시작된 관광두레사업은 37개 지역의 156개 주민사업체가 참여해 현재까지 32개 사업체가 창업과 경영 개선에 성공했다. 이 사업체들은 평균 8명의 실행인력을 신규로 채용했고, 이 중 14개 사업체는 월평균 1,000만 원 이상의 고정 매출을 올리는 등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특히 합천공예협동조합은 합천영상테마파크 내 기념품숍인 ‘기억가운데기차’를 운영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기념품이 없던 지역관광의 문제를 사업과 접목해 해결했다. 여수의 수-레인보우협동조합은 한상차림 여행자식당인 ‘여수1923’을 운영하면서 다문화이주여성과 지역 노인 등 다양한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고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했다. ‘2016 관광두레 전국대회’에는 37개 지역 156개 주민사업체의 주민과 관계자 등 약 800명이 참가해, ‘진짜여행의 가치, 관광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선산 궁기동 석불상 (善山 宮基洞 石佛像)은 도개면 신곡리 산68번지에 위치한 문수사 경내에 있는 석불 좌상(坐像)이다. 도개중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학교 증설로 인해 2008.1.10 문수사로 옮겨왔다. 불신과 광배(光背), 대좌(臺座)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광배의 윗부분과 머리 부분이 깨진 상태다. 사각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대좌 아래까지 옷자락을 내려뜨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에 들어 올려 연꽃가지를 잡고 있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는데, 손모양으로 보아 어느 본존불의 협시보살로 생각된다. 오른손에 든 연꽃가지의 줄기가 허리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광배에까지 두드러지게 올라와 있으며, 광배에는 연꽃 봉오리가 크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광배는 윗부분이 잘려 나갔지만 끝이 뾰족한 타원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배 안에는 덩쿨무늬, 연꽃무늬, 불꽃무늬, 작은 부처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광배의 뒷면에도 앉아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를 선으로 새겼는데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광배 뒷면의 부조상은 통일신라시대에 가끔 보이는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아한 형태미와 특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요지는 도자기나 기와·그릇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천황산의 봉우리 중 평평한 고원지대에 위치하는 백자 가마터로 5∼6기가 있다. 높이1,100m가 넘는 험준한 산의 꼭대기부분에 있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마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견되는 백자조각들은 대접·사발·바래기·접시·술잔조각 등이 대부분이며, 접시 중에는 아가리가 안으로 말리거나 밖으로 말려있는 것도 있다.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닌 중·하품의 백자를 굽던 곳으로, 순백자 뿐 아니라 검은 빛깔로 그림이 그려진 철화무늬 백자조각들도 발견된다. 철화무늬는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풀무늬 또는 원 모양과 원점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상도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조선 중기의 지방 철화백자 가마터로 의의가 있다. ※(천황산요지군 → 울주 천황산 요지)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최근 암살, 덕혜옹주, 밀정 등 흥행 행진을 이어가는 영화들은 모두 구한말 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시기의 시대상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당시 발간된 신문을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1883년 창간),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1896년 창간), 최초의 일간 신문인 매일신문(1898년 창간) 등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신문들을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한눈에 볼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과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김병호)이 손을 맞잡았다. 현재는 이원화 체제. 국립중앙도서관은 6․25전쟁 전(1898~1949)까지 발행된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 등 고신문 50종을 디지털화하여 도서관 홈페이지(www.nl.go.kr)을 통해 제공하고 있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은 구한말 한성순보를 비롯해 해방 전(1883~1945)까지 발행된 독립신문, 협셩회회보, 매일신보 등 고신문 15종을 빅카인즈(www.bigkinds.or.kr)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고신문을 디지털화하여 서비스하고 있는 대표적인 두 기관이 데이터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조선 중기의 문신 박정(1629∼1703)의 초상화 2점이다. 박정(朴正)은 광해군 11년(1619)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2점의 초상화 가운데 하나는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하여 몸체가 너무 크고 화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구도가 어색하나 옅은 갈색을 사용한 얼굴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특히 수염이나 눈썹의 표현은 매우 섬세하여 성격까지도 나타나도록 표현하였다. 화면의 아래 부분에는 양탄자가 그려져 있다. 가슴에 있는 흉배에는 정3품 흉배에 그려지는 새인 백한이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공신이 되어 정3품 벼슬을 하였을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얼굴 부분과 몸체 부분의 바탕이 서로 다른 천으로 되어 있고 얼굴 표현과 몸체를 비롯한 화면 아래부분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난다. 먼저 그려진 얼굴부분을 토대로 나중에 천을 이어 붙이고 몸체부분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의 초상화는 녹색의 관복을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용사일기목판 (龍蛇日記木板)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송암 이노(1544∼1598)가 쓴 전쟁일기를 새긴 것이다. 이노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24년(1591)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와 함께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을 모으는 등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 30년(1597)에 『용사일기』를 완성하였으며, 그 이듬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는 선조 25년(1592)에서 선조 30년(1597)까지의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동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조 39년(1763)에 후손 이당혁에 의해 비로소 간행되어 유포되었다. 처음에는 서문 2매, 본문 74매, 장계 7매, 발문 5매 등 총 88매로 제작되었으나, 상당부분 훼손되고 잃어버려 현재는 약 40여판이 함휘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이순신의『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 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 기자] 〈소나기〉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본 단편소설이다. 소년과 소녀가 주고받은 아련한 사랑은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순수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 감동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 양평의 소나기마을이다. 이곳에는 황순원문학관을 비롯하여 〈소나기〉에 등장하는 징검다리, 수숫단 오솔길, 송아지 들판, 고백의 길 등을 조성해놓았다. 관람객은 산책을 하며 〈소나기〉의 주인공이 되어보고, 사춘기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 특히 소나기 광장에서는 매일 세 차례 인공으로 소나기가 내려 빗방울에 젖은 추억이 오래도록 남는다. 문의 :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031)770-2066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자료:문화재청
[우리문화신문=최미현기자]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는 미륵불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장곡사에 있는 이 그림은 가로 5.99m, 세로 8.69m로 미륵불을 화면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 여러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미륵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머리에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유난히 긴 팔과 커다란 상체를 가지고 있다. 좌우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머리에 둥근 두광이 있고 각각 두 손을 맞잡은 손 모양과 어깨 높이까지 두 손을 들어 올려 설법하는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여래와 보살들은 각기 상징하는 물건들을 들고 있으며 10대 제자는 두손을 모아 합장한 자세로 방향이나 표현을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인 채색은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 연록색, 주황 등의 중간 색조를 사용하여 밝은 화면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조선 현종 14년(1673) 철학(哲學)을
[우리문화신문= 최미현 기자] 조선 왕릉은 조선왕조 500여 년에 이르는 역사를 품고 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인멸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많은 9기가 모여 있어, ‘조선 왕릉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왕릉과 역사가 전해진다. 주변에 숲이 울창하고, 자연 생태도 잘 보존되어 산책이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서울 시내와 경기도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아차산은 가족과 함께 산행하기 좋다. 등산로 초입에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촬영한 고구려대장간마을과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 산등성이에 고구려의 군사시설인 아차산 일대 보루군(사적 455호)이 있어 산행과 유적 답사를 겸하는 코스다. 구리타워와 구리시곤충생태관,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은 구리시 자원회수시설에 자리 잡아 함께 둘러보기 좋고, 구리코스모스축제가 열리는 구리한강시민공원도 가까워 초가을 가족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문의 : 구리시청 문화예술과 031)550-8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