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오신날(5월 8일)을 1주일 앞두고 지난 4월 30일(토), 도심에서는 형형색색의 대규모 연등행렬이 어둠을 밝혔다. 올해 연등회의 주제는 '다시 희망이 꽃피는 일상으로의 복귀'로 특히 지난 2020년 12월 연등회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이후 이뤄진 첫 대규모 행사여서 더욱 뜻깊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대규모 행사를 치룰 수 없다가 이번에 3년 만에 재개된 연등행사는 저녁 7시에 흥인지문을 출발해 종로 일대와 조계사에 이르는 2.9km 구간에서 진행되었다. 연등행렬에는 부처님 형상과 코끼리, 사자, 사천왕 등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연등이 앞장서고 그 뒤를 장엄등과 개인등을 든 스님과 불자들이 따랐다. 이번 연등행사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동안 일상생활의 제약을 받았던 시민들은 화려한 연등행렬을 바라보며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편, 불기 256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행렬, 전통등전시회, 연등법회, 회향한마당, 전통문화마당·공연마당, 연등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아울러 청계천 전통등전시회(4월26일~5월10일), 조계사 앞 등간 및 인사동 행렬등 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66년을 맞이하여 전국의 불교사진가들이 봉축기념으로 해마다 시행하는 사진전으로 올해는 '사찰의 아름다운 꽃문살'과 '사찰의 벽화'를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지난 번 기사에는 '사찰의 아름다운 꽃문살'을 기사로 올렸는데, 오늘은 '사찰의 벽화'를 올린다. 한국의 절에 들어가면 각각의 전각에 많은 불상, 보살 등 입체조각상들이 있지만 건물의 내부와 외부에는 부처님, 보살, 나한, 천신, 스님 등 그림들이 가득하다. 사찰의 전각 벽면에 그려진 모든 그림이 뜻하는 바가 다 다르지만, 아무런 뜻이 없이 그려진 그림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언뜻 보면 아름다운 산천을 그린 풍경화 같지만, 알고보면 이 또한 불교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한 장면이다. 이번 전시작으로 나온 벽화 외에도 다양하고 많은 그림들이 있으니, 사찰에 가면 다양한 벽화의 의미도 찾아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일정: 서울전시: 인사동 일조원갤러리 4월 27일 ~ 5월 3일 대구전시: 대구문화예술회관 5월 17일 ~ 5월 22일 광주전시: 학생교육문화회관 6월 8일 ~ 6월 15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을 중심으로 조성된 조선왕릉 가운데 한강을 건넌 김포에는 장릉(章陵)이 있다. 김포장릉은 '정원군'으로 선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배다른 형인 광해군에 밀려 자신은 왕이 되지는 못하였고, 그의 아들(능양군)이 큰아버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등극하는 바람에 왕의 아버지(대원군) '원종'으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무덤 이름도 홍경원이었으나 한참 뒤에 왕릉으로 격상되어 '장릉'이 되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대원군)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곳이나 함께 묻힌 합장릉이 아니고 봉분이 각각 있는 쌍릉이다. 정자각에서 올려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정원군)의 왕릉이고 오른쪽이 인헌왕후 구씨의 왕비릉이다. '왼쪽에 남자, 오른쪽에는 여자의 자리'로 정해진 유교시대의 위계질서에 따른 봉분의 배치댜. 원종은 1619년 광해군 11년 일찍 세상을 떠나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무덤을 썼고 그 무덤 이름을 '홍경원'으로 불렀다가, 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1623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연주부부인 구씨가 1626년 세상을 뜨자, 풍수적으로 명당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 정원대원군의 무덤과 멀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절은 2000년 전에 들어온 외래문화가 한국의 문화로 수용되어 정착되는 과정이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오랜 외침에 의한 전란과 화재로 정성들여 지었던 건축물들이 무상하게 사라진 뒤에도 우리 선조들은 없어진 전각들에 대한 아쉬움을 한탄하지 않고, 또 다시 힘을 내어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지었고, 건축물에 들어가는 문에도 아름다운 문살을 마치 조각품처럼 장식하였다. 그리고 그 정성이 작품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 절의 건축물에는 건물의 정면에 빛을 받아들이고 또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아름답게 꽃살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건물의 내부를 밝히기 위하여 빛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드나드는 문의 의미를 넘어서 부처님의 앞에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을 오래도록 공양하기 위하여 꽃 무늬로 새겨넣은 것이다. 사찰의 주요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주변에는 화려한 난초꽃 화분들을 올리는데, 난초는 얼마지 않아서 시들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꽃살문으로 새겨놓으면 부처님은 건축물이 살아있는 한 언제나 화려한 꽃을 공양받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절에는 화려한 꽃살문양을 새겨놓는 것이다. 꽃살 무늬는 발전하여 문짝을 화려한 연꽃밭으로 바꾸기도 하였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절의 전각들은 대부분 돌로된 기단 위에 지었다. 절의 건축물의 주 재료는 나무로 되었지만, 나무는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직접 땅에 닿으면 쉽게 썪게된다. 따라서 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둥이 흙과 닿는 부분에는 돌로 된 주초석을 깔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를 대들보와 도리를 둘러서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서까래를 얹은 뒤 기와를 이어서 집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집을 짓기 위하여 습기를 방지하고, 또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하여, 대지 보다 한단 높게 기단을 만들었는데, 한국 절의 기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장식하여 아름답고 격조있게 만들었다. 이는 건물의 격을 높이기도 하지만, 그 건물에 모셔진 부처님을 정성으로 떠받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절을 대상으로 사진을 담아온 불교사진작가들의 모임 심상(心像)의 33번째 작품전으로 어려운 코로나19의 시절에도 변함없이 촬영에 임하여 얻은 작품들을 엄선하여 선보이는 것이다. 한국 절 건축의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돌로된 기단과 계단의 옆에 있는 소맷돌만을 주제로 열리는 사진을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건축의 미를 새롭게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위 사진들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 전시중인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이다. 국보 제83호는 국보 제78호와 매우 흡사한 반가사유상으로 연꽃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오른발 무릎 위에 괴고, 괸손은 오른쪽 볼에 지긋이 댄채 가늘게 눈을 뜨고 입가에는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명상에 잠겨있다. 이러한 모습은 두 반가사유상이 비슷하지만 국보 제83호는 보살의 몸에 걸친 옷이 완전히 몸에 밀착되어 옷을 입지 앉은 모습처럼 보이고, 머리에 쓴 삼산관(三山冠) 보관 형태 등이 국보 제78호 보다 훨씬 간략화되어 있어 확연히 다르다. 윗몸에 걸친 옷은 몸의 윤곽이 다 드러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얇은 천상의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앉은 의자는 연꽃이 뒤집혀진 복련의 연잎이 바닥에 엎어진 모습으로 활짝 피어있고, 치마처럼 두른 하의가 보살의 다리를 감싸고 앞부분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복련의자를 감싸내리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국보 제78호와 흡사하지만, 그보다 더 세련된 모습이며, 머리의 뒷편에는 광배를 달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뾰족한 뿔이 나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뒤 수많은 불상들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은 2기가 있다. 2기의 반가사유상 중 먼저 국보 제78호가 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반가사유상이고 뒤이어 국보 제83호가 된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세상에는 국보 제83호가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2기의 반가사유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실에서 함께 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불상만큼 조형감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러한 반사사유상의 조성시기는 주로 6∼7세기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무릎 위에 걸치고, 왼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발 무릎 위에 받치고 손가락 2개를 펴 얼굴 볼에 대고 있는데, 얼굴은 부드럽고 둥글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뜬채 발 아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든 까닭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용광로에 청동을 녹여서 미리 만든 조형틀에 부어 만들었는데,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은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뒤, 두부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끝나가는 날 잔설이 남아있는 용인시 한 야산에 고려시대 마지막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를 찾았다. 선생은 1337년 태어나 1392년 정적에 의하여 생을 마친 고려시대 최후의 학자로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는 당대의 의인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구걸하듯 살지 않고 자신이 살았던 나라를 위하여 당당히 죽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또 협조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정의로운 삶을 살다간 것이다. 혼란의 고려말 덕망있는 학자로 조선에 참여하지 않은 3인의 유학자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호(號)에 은(隱)을 썼기에 고려3은으로 볼리운다. 이들은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가 있다. 정몽주선생은 고려후기 몽골간섭기에 태어나 고려 공민왕 9년(1360), 과거시험에 3회에 걸쳐 연속으로 장원급제하여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대사성문호찬성사,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호시중 등 당시 최고위 관료가 되었으며 그 공이 커 안사공신의 휘호도 받았다. 선생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오부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교의 믿음에 있어서 관세음보살은 부처님보다도 더 많이 불리우고 있으며, 그만큼 많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조각되어 불전에 모셔져 왔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친 분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라면, 보살은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을 부처님처럼 깨달음으로 인도하거나,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 부처와 사람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수많은 보살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불리우는 대표적 보살로 대승불교를 따르는 한국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모시고 기도하는 절들도 많이 있다. 관세음보살의 기도처로 유명한 한국의 절들은 다음과 같다. 양양 낙산사, 양양 휴휴암, 남해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향일암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에는 수많은 관음사들이 있고, 대부분의 한국절에는 관세음보살이 별도의 전각에 모셔져 있다. 그만큼 친숙한 대상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불교적 의미는 어떤 어려움 어떤 소원도 한량없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준다고 하여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이와 같이 친숙한 관세음보살은 소승불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인년(壬寅年) 검은호랑이 해를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한국인의 삶속에 함께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호랑이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은 한반도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백수의 왕 무서운 호랑이이지만, 옛 선조들은 호랑이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우리의 삶속에 함께해 왔다는 것을 그림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의 삶속에 나타난 호랑이는 실제의 모습 보다는 해학적으로 재미나게 표현한 게 많다. 실제는 무섭기 그지없는 호랑이를 어리숙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변형하여 마치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호랑이는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로, 그 길이가 1.8m 꼬리길이는 90cm 에 이르며, 걸을 때에는 뒷발이 앞발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호랑이는 뛰어오르는 힘이 좋아서 4m에 이르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때에는 10m도 뛰어내린다. 몸은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털이 온 몸에 두른 모습으로, 그 수명은 15~20년을 살아간다. 호랑이의 임신기간은 비교적 짧은 100~110일 정도로 보통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겨울에 임신하여 봄에 새끼를 낳아서 기르며, 새끼의 크기는 고양이만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