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인선 기자] 길 위에서 생의 이정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코요테의 땅'이라는 뜻을 품은 멕시코시티의 '코요아칸'. 거리를 걷는 내내, 제 마음은 이름 모를 설렘으로 일렁였습니다. 거리마다 뿌리를 깊게 내린, 오래된 가로수들은 그늘을 드리우며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다정하게 다독여 주더군요.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프리다 칼로의 푸른집'이었습니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그곳의 강렬한 푸른 벽은 그녀가 겪어낸 고통보다 더 선명한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굽이치는 골목마다 노랗고 분홍빛을 띤 예쁜 집들이 줄지어 서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마치 한 폭의 수채화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가 표지판 위에 조용히 앉아있는 코요테 조형물은 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요. 그곳에서 20분 남짓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역사의 한 페이지인 레온 트로츠키 박물관과 마주하게 됩니다. 머나먼 소련에서 온 혁명가는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이제는 고요한 정원 돌비석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디에고와 프리다 부부의 따뜻한 손길이 머물렀던 그곳에서, 100여 년 전 뜨거웠던 혁명의 열기를 가만히 가늠해 보았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 전날입니다. 그런데 이 구세주 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신앙이 됩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미래의 사바세계(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님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미륵불 신앙과 관련된 기록이 있을 정도였는데 오랫동안 백성들의 희망 신앙으로 받아들여 폭넓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가면 친근한 모습의 돌미륵들을 쉽게 볼 수 있지요. 또한 고려말에는 바닷가 개펄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이도 역시 미륵신앙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자주 출몰하던 왜구 때문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바닷가에 묻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불이 오시기를 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성탄절 신앙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 신앙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궁예(弓裔)는 호를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금모자를 쓰고 몸에는 네모난 가사를 입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고 나아갈 때에는 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되 어린아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현재 전하는 경수연도(장수 축하ㆍ기원 잔치인 경수연을 그린 그림) 가운데 유일한 원본인 「신중엄경수도첩」을 비롯해 「영산회상도」, 「묘법연화경 권3」, 「구례 화엄사 동종」, 「고려 수월관음보살도」, 「‘영축사’명 영산회상도」까지 모두 6건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각각 지정하였다. 고령신씨영성군파 문중에 전해오는 《신중엄경수도첩(申仲淹慶壽圖帖)》은 1601년 80살를 맞은 신중엄(申仲淹, 1522~1604년)의 아들 신식(申湜)과 신설(申渫)이 아버지의 장수를 축하하며 연 경수연을 기려 만든 서화첩이다. 경수연은 1601년 12월 12일 처음 연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열렸다. 이 잔치는 서대문 인동(仁洞)에 있는 신중엄의 자택에서 열렸는데, 당대의 주요 관원과 명문장가, 명필가 등이 참석하였다. 신중엄경수도첩에는 맨 앞에 허목의 전서*체 글씨 <경수미정(慶壽眉鼎)>ㆍ<경수도첩(慶壽圖帖)>이 쓰여 있으며, 화공(畫工)에게 부탁해 그린 <경수연도(慶壽宴圖)>ㆍ<서문구모도(西門舊茅圖)>ㆍ<용산강정도(龍山江亭圖)>ㆍ<누정한일도(樓亭閑日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