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9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7일(일요일), 이동 거리 234km 호텔 : 북경풍영군화(北京丰荣君华, 010-8146-3366) 열하에서 황제를 만나다 1780년 8월 13일, 건륭제의 만수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열하에 간 조선 사신단의 규모는 사신 10명, 수행원 64명으로 모두 74명이었고 말 55필이었습니다. 열하는 정치·군사적, 전략적인 필요로 건설되었으며, 몽골과 연합하여 준가얼 세력까지 점령했습니다. 해마다 만주 팔기군과 몽골 팔기군이 목란에 사냥터를 조성하여 군사 훈련을 겸한 무력시위를 하였습니다. 열하의 입구 여정문(麗正門)에 도착하니, 어제 만나서 취재하던 승덕시 관광국 관계자와 기자들과 관련 공무원 여러 명이 이른 아침인데도 나와 저희를 맞이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오늘까지 이국복 교수가 안내하였습니다. 여정문 앞에서 우측 화단에 중국 정부에서 설치한 연암 박지원 비석을 찾았습니다. 큰 돌 한쪽 면을 다듬어 박지원의 공로를 소개한 비석을 세워 두었는데, 가이드 황일만 사장이 사전에 답사하여 비석을 찾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문으로 새겨진 '朴趾源'이라는 이름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8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6일(토요일), 이동 거리 167km 호텔 : 승덕열하부주점(承德热河付酒店, 0314-2208-666) 금산령 만리장성에 올라서 이른 아침, 고북구에 있는 금산령 만리장성을 올랐습니다. 해발 380m 정도의 높이지만, 산꼭대기에 설치된 여러 개의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대)와 산 능선을 따라 굽이치는 거대한 벽돌 성벽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합니다. 성벽을 따라 오르는 계단 양옆이 아찔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힘차게 뻗어 나가는 성벽의 줄기는 아름다웠습니다. 《열하일기》에 “1780년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 장성에 이름을 쓰려고,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行橐, 여행할 때 노자를 넣는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성 밑에 벌여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밝은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연암은 글자를 썼다.”… 1780년 8월 11일 돌아오는 길에 고북구에 들렀습니다. “내 저번에 새 문을 나갈 때는 마침 밤이 깊어서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와 반대로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7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5일(금요일), 이동 거리 199km 호텔 : 고북구고원금색주점(古北口古源金色酒店 010-6903-2388) 북경의 거리는 깨끗하고 빌딩 숲으로 세계 일류도시로 변모하였나, 도로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목에 건 정보무늬(QR코드) 인식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거지도 최첨단 슬기말틀(스마트폰)로 결재를 받는 모습을 보며, 중국 사회의 변화에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연암은 1780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자금성 남서쪽에 있는 조선 사신이 묵는 조선관에서 머물며 여러 기록을 남겼습니다. 필자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그 규모와 화려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살아있는 박물관 자금성 천안문 자금성(故宫博物院 紫禁城)을 보려고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7시에 출발했습니다. 8시 40분경 천안문이 보이지도 않는 ‘전문대가’에서부터, 줄 서서 지하차도 두 개를 지나고, 소지품과 가방을 철저하게 뒤지고 검색대를 통과했습니다. 안면 인식과 입장권을 확인하고서야 오전 10시 20분경 천안문 광장에 진입하여 자금성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사에서 입장권을 살 때 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