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8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6일(토요일), 이동 거리 167km
호텔 : 승덕열하부주점(承德热河付酒店, 0314-2208-666)
금산령 만리장성에 올라서
이른 아침, 고북구에 있는 금산령 만리장성을 올랐습니다. 해발 380m 정도의 높이지만, 산꼭대기에 설치된 여러 개의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대)와 산 능선을 따라 굽이치는 거대한 벽돌 성벽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합니다. 성벽을 따라 오르는 계단 양옆이 아찔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힘차게 뻗어 나가는 성벽의 줄기는 아름다웠습니다.
《열하일기》에 “1780년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 장성에 이름을 쓰려고,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行橐, 여행할 때 노자를 넣는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성 밑에 벌여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밝은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연암은 글자를 썼다.”…
1780년 8월 11일 돌아오는 길에 고북구에 들렀습니다. “내 저번에 새 문을 나갈 때는 마침 밤이 깊어서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와 반대로 대낮이므로 수역과 더불어 잠깐 모래벌판에 쉬다가 곧 첫째 관(關)으로 들어섰다. 이 관은 천고의 전쟁을 치른 마당이므로, 천하가 한번 어지러우면 곧 백골(白骨)이 뫼처럼 포개어지게 되니, 이야말로 진실로 이른바 호북구였다.”의 기록으로 두 번이나 들렀던 곳입니다. 연암의 기록처럼, 만리장성은 역사의 아픔과 인생의 덧없음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답사단은 서둘러 승덕시로 출발하였습니다.

승덕시 정부의 극진한 환영 행사
승덕시에 들어서니 북경중성국제여행사(北京中圣国际旅行社) 손광휘 사장이 마중을 나와 1년여 만에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보타종승지묘’를 찾았습니다. 입구에서 승덕시 관광국 직원들이 ‘열하일기 답사단 방문 열렬히 환영’이라는 문구를 새긴 붉은색 펼침막을 가지고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시 직원과 지역 신문기자, 그리고 ‘하북성 영화텔레비전그룹 제작사(河北影视集团天速电视剧制作有限公司)’에서 온 ‘열하일기 다큐멘터리 제작팀’ 10여 명이 우리 답사단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며, 인터뷰와 촬영하였습니다. 또, 열하지역 안내는 승덕시에서 파견한 용정 출신, 승덕관광대학교 한국어과 중국 동포 ‘이국복 교수’가 1박 2일 동안 안내하였습니다.
우리도 긴 여정 끝에 열하에 도착하여 흥겨운 축하 길놀이를 펼쳤습니다. 이윤선 교수와 하영택 이장의 장구 장단에 맞춰 신명 나게 춤을 추고, 축하 노래로 엄수정 명창이 아리랑을 불러 흥겨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녁 만찬은 승덕시 관광국 국장님의 초청으로 전통 음식점에서 황제의 식단이 준비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어진 ‘강희대전’ 공연 관람장 입구에서 공연 출연진 100여 명이 도열하여 특별 의전까지 받으며 입장하였습니다.
승덕시 정부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이 모든 사항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나라임을 고려할 때, 이번 답사단의 일정을 미리 보고받고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관광 목적이 아니라, 245년 전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취재하고 성대한 환영을 베푼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환대는 매우 고무적이며, 이번 답사에서 거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연암이 1780년 8월 9일부터 8월 14일까지 이곳 승덕에 머물렀던 역사적인 시간과 우리의 답사가 겹치면서, 단순한 유적지 방문을 넘어선 특별하고 의미 있는 체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庙) : 열하에 있는 외팔묘(外八庙, 티베트 불교 사원), 보령사 등 12개의 사원 가운데 하나로,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떠 지은 매우 큰 규모의 사원이다. 흥미로운 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창문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벽으로 막힌 사각형 창틀만 있었습니다. 건물은 큰 사각형 옹벽처럼 만들어져 내부로 진입하니, 벽 내부 안쪽으로 회랑식 전각이 있고 가운데 만수귀(萬壽歸)라는 전각을 지어 불상 대신 동태칠법랑라마탑(铜胎掐丝珐琅喇嘛塔)을 모셔 놓았습니다. 전각 위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오르니 황금색 지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연암은 1780년 8월 11일, 황제의 명으로 찰십륜포(札什倫布) 라마교 판첸라마 반선을 만나러 갔던 기록에서,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스님을 만나서 대충 절하는 장면을 “앉을 때 조금 허리를 구부리고 소매를 들고는 이내 앉으니, 군기대신은 얼굴빛이 황급해 보였지만 사신이 벌써 앉아버렸으니 또한 어쩔 수가 없는지라 숫제 못 본 체했다”라고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나와 티베트 양식의 수미복수지묘(须弥福寿之庙)를 둘러보고 열하 문묘로 향했습니다.

열하 문묘(热河文庙) :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현재 보수 공사로 문을 닫아 일반인 출입이 어려웠으나, 승덕시 관광국의 협조로 문을 열고 들어가 답사할 수 있었습니다. 연암은 이곳 명륜당에 묵으며 황제를 알현하였습니다.
계속되는 일정에 지친 연암은 “1780년 8월 9일, 정사 머리맡에 술병 둘이 있기에 흔들어 보니, 하나는 비고 하나는 차 있었다. 달이 이처럼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으리. 마침내 가만히 잔에 가득 부어 기울이고, 불을 불어 꺼버리고서 방에서 나왔다. 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이런 때에는 어찌 우리 일행만이 모두 잠들었으랴. 도독부(都督府)의 장군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곧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베개에 머리가 저절로 닿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연암은 달빛 아래 술 한잔에 취해 홀로 사색에 잠기며 풍 류를 즐겼던 애주가이자 문장가였던 것 같습니다.
관제묘(关帝庙) : 1780년 8월 10일, 사신단이 1박 한 곳으로, 관우를 주신으로 모시는 사당입니다. 입장하여 내부를 둘러보았습니다.
강희대전 공연 관람(康熙大典) : 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야외 공연장으로, 대략 3,000여 석 규모에 많은 관광객이 입장해 있었습니다. 해가 지면서 공연이 시작되는데, 입체 음향과 조명, 3D 영상을 혼합하여 400~500여 명의 출연진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말을 타고 달려서 관객이 잠시라도 한눈을 팔 틈이 없이 빠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공연을 보는 동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공연으로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