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전시(戰時) 상황에서 물자 특히 무기 생산에 필요한 금속자원이 부족하여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민관이 소유하고 있던 금속류의 회수가 시작되었습니다. 1941(소화16)년 8월 30일 공포하여 같은 해 9월 1일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 ‘금속회수령’이 그것입니다. 금속회수는 관공서, 직장, 가정을 불문하고 어린이들의 완구를 포함한 모든 금속류를 회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이치현(愛知縣)에 있는 “이누야마고등학교(犬山高等學校)의 역사”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금속류 곧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전쟁 물자로 쓰기에 바쁘다 보니 이누아먀고등학교는 철제 교문까지 뜯겨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 상황은 듣기 좋은 말로 ‘금속류 회수’이지 이건 숫제 공출을 넘어 ‘갈취’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부인들은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몸에 지닌 것을 모두 내놓자”는 구호로 제국주의 정부의 ‘금속류 회수’ 작업에 동참했다. 1943년(소화18) 4월에는 ‘비상회수’ 조치가 내려졌고 11월에는 ‘강제회수’로 까지 진전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강제 회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태풍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초비상이다. 글쓴이가 8월 20일 무렵 일본에 가 있을 때도 태풍 제9호와 10호의 상륙으로 일본열도가 긴장을 늦추지 않더니 9월 6일 기상청 일기예보에는 어느새 발달한 제13호 태풍이 오키나와 남쪽 나하시(那覇市) 180km 부근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보도다. “태풍 제13호는 6일 18시 북동쪽으로 매시간 35km 진행하고 있으며 중심기압 1000hPa、중심부근의 최대 풍속은 20m/s이다. 이 태풍은 7일 18시에는 무로토미사키(室岬) 남쪽110km에 도달할 예정이니 태풍주변 해역 및 태풍의 진로로 예상되는 부근에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일기예보가 하루 종일 TV와 라디오, 신문 따위에서 반복해서 일본 국민에게 알려주고 있다. 같은 시각 한국의 일기예보는 태풍 이야기가 없다. 예부터 일본에서 “210일 날 큰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데 210일이란 새해 1월 1일부터 세어서 210일째 되는 날로 9월 1일이나 2일이 이에 해당하는 날이다. 약간 210일설은 벗어나지만 1954년 9월 26일은 일본 태풍 관측사상 가장 큰 태풍이 몰아쳐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라에는 오래된 절들이 많다. 도다이지(東大寺), 다이안지(大安寺) , 호류지(法隆寺), 고후쿠지(興福寺)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만큼 고찰들이 있다. 이러한 고찰이 메이지(明治)정부의 훼불로 수난을 받은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의 훼불을 보는 듯 한데 안타까운 것은 절의 문화재가 한순간에 날아갈 뻔 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때는 1871년(메이지4년) 11월의 일이다. 원래는 절과 신사가 한 경내에 나란히 있었지만 불교를 폐한다는 정책이 발표되고 곧 시행에 들어가자 천년고찰 고후쿠지(興福寺) 승려들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신사(神社)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후쿠지(興福寺) 경내에 있던 오중탑의 운명이다. 승려들이 사라진 절 경내는 이내 황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에 있는 오중탑과 삼중탑 역시 임자를 찾아 판매에 부쳐졌다. 오중탑은 당시 돈으로 250엔, 삼중탑은 30엔에 미사브로(彌三郞)라는 사람이 사게 되었는데 미사브로는 이 탑을 불태워 없애고 그 대신 탑에 사용된 금붙이를 거둘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민의 반대로 무산되어 다행히도 아름다운 오중탑을 오늘날 보게 된 것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소학관에서 나온 《일본사세시기366일(日本史歲時記366日)》의 8월 24일 이야기를 보면 좀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풍신수길 시대인 1594년 8월 24일 강도 두목인 이시카와고에몬(石川五右衛門)이 잡혀 그 가족과 함께 산채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허구로 여겨졌으나 예수회 선교사인 페트로모레몬의 일기 속에 “이 일은 분로쿠 3년 여름일이다. 기름에 튀겨진 인물은 다름 아닌 이시카와고에몬과 그 가족 9명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와 실제 사건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기록한 또 한사람은 에도초기의 학자인 하야시라잔(林羅山)이다. 하야시라잔이 편찬한 《풍신수길보(豊臣秀吉譜)》에 따르면 “분로쿠 시절 이시카와고에몬이라는 도적이 강도 등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로 풍신수길이 체포하게 하여 어머니 이하 28명의 관련된 사람들을 산죠가와라에서 삶아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후 날강도 이시카와고에몬은 의적(義賊)으로 변신, 가부키(歌舞伎)등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뜨거운 가마솥에 빠트려 죽었다고도 하고 펄펄 끊는 기름에 튀겨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마다 다카오(山田貴夫)씨를 만난 것은 8월 13일 오후 4시 인천관동갤러리에서였다. 이에 앞서 인천관동갤러리 관장인 도다 이쿠코 씨로부터 야마다 씨에 대한 간략한 누리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야마다 씨는 반(反)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증오 조장자)인데 8월 13일 인천 관동갤러리에 올 예정이니까 취재를 해보라.”는 언질이었다. 찌는 날씨 속에 야마다 씨를 만나러 인천 관동갤러리로 달려갔다. 오후 4시 쯤 야마다 씨는 갤러리 안에 들어섰는데 자그마치 6명의 일행과 함께였다. 야마다 씨가 인천에 온 것은 개항지인 인천의 여러 유적지를 보러 온 것으로 특별히 나하고 인터뷰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는 일행도 있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기회에...”라고 하며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한인면모(韓人面貌) - 중국 조선족 이야기] 전시를 둘러보고 헤어졌다. 약간은 아쉬웠으나 야마다 씨가 귀국하여 도다 이쿠코 씨에게 보내온 누리편지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덕택에 인천과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 다만 시인 이윤옥 선생과의 인터뷰를 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가와사키시(川崎市)의 반헤이트운동(반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더위에 안부를 여쭙니다. 날마다 무더위가 계속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저는 삿포로에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입니다. 상상과는 달리 홋카이도의 여름도 무척 덥습니다. 올 여름은 예년에 없는 더위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잘 지내시길 빕니다. 2016. 8. 6 아무개 올림” 이는 무더운 여름철 지인의 안부를 묻는 편지인 ‘쇼추미마이(暑中見舞い)’의 예문이다. 무더운 여름철에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내용으로 ‘쇼추미마이(暑中見舞い)’를 쓰라고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많다. 쇼추미마이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편지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안부를 묻는 뒷면에는 시원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대관절 언제 쇼추미마이를 보내면 좋을까? 쇼추미마이는 보통 장마가 갠 뒤 소서(小暑)부터 대서(大暑) 사이에 많이 보내는데 올해의 경우에는 7월 7일부터 8월 7일 사이가 적기(適期)다. 그러나 이 날짜가 지나도 걱정은 없다. 이 기간을 놓친 사람들을 위한 “잔쇼미마이(殘暑見舞い)”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꼭 ‘잔쇼(殘暑)’라는 말을 안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베 다케시(阿部建) 씨는 올해 나이 84살이다. 그는 지난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4박 5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다리도 약간 불편한 그가 한국을 찾은 까닭은 그의 가족사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자그마치 40명이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그 가운데 34명이 한국에서 삶을 마감했다. 아베 씨 자신도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그는 지금 한국에서 살다 한국에서 죽은 자신의 가족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구상 중에 있다. 아베 씨는 외가를 소재로 하는 소설을 쓸 예정인데 한국에 오기 전 필자에게 자료 요청을 한 바 있다. 그가 요구한 자료란 다름 아닌 일본인과 가정을 꾸린 외할머니에 관한 것들이다. 그의 외할머니는 부모님이 105인 사건(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 최후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에 연루되어 10살의 나이로 고아가 된 인물이다.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녀는 외삼촌 집에 맡겨지는데 외삼촌이 살고 있는 마을은 평안북도 박천군 맹중리로 읍내에는 우편취급소가 있었다. 어린 소녀는 외삼촌의 보살핌으로 자라나는 데 이 마을의 우편취급소장이 외삼촌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 인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일컫는 나라현 비조사(飛鳥寺, 아스카데라)의 원형은 부여의 왕흥사(王興寺)일 가능성이 높다고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와세다대학의 오오하시(大橋一章, 불교미술사)교수 등 일본 연구 팀이 이번 달 초 부여 왕흥사 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여기서 출토된 기와 문양과 탑 구조 들이 비조사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는 2008년 4월 17일 중앙일보가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를 인용해 쓴 기사다. 부여의 왕흥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었던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절이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2007년 이곳에서 발굴된 「창왕 청동사리함 명문」에 따르면 왕흥사는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고대 부여와 아스카(飛鳥)는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실제로 아스카에 가면 그런 느낌을 더 실감하게 된다. 필자도 아스카는 곧 부여라는 생각을 여러 번 몸과 마음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한국의 시골 같은 분위기 말고도 아스카에 남아있는 여러 불교 관련 유적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것 같다.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국립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지금 아키히토(明仁) 일왕(日王)의 ‘생전퇴위’ 문제를 놓고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생전퇴위(生前退位)란 말 그대로 죽기 전에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역대 왕은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예도 많고 상왕이 되어서도 정치에 관여한 왕도 있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명치 22년(1889)에 제정된 구황실전범과 등극령에서 규정하기를 왕위 계승은 왕의 죽음으로 계승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왔다. 따라서 생존 시에 퇴위는 불가능한 입장이다. 그러나 현재 왕이 생전에 황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생전퇴위’를 고려하고 있다는 의향을 궁내청에 전했다는 사실이 7월 13일 밝혀져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일왕은 수년 내에 퇴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일본 정부는 황실전범 개정의 필요성과 왕위 계승의 방법에 대한 검토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7월 14일 산케이뉴스에 따르면 궁내청은 헤세이 21년(2009)부터 고령인 일왕의 건강을 고려하여 일부 식전(式典)에서의 축사를 없애고 외국의 국빈 면회도 줄여 부담을 줄여왔다고 알려졌다. 올해의 경우, 5월에 일왕의 공무를 10건 정도 줄였다. 지난해 1년간 일왕의 공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마츠리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각종 마츠리(祭, matsuri, 축제)가 많다. 특히 그 가운데 7월 한 달 내내 하는 교토의 기온마츠리(祇園祭)는 가장 손꼽히는 마츠리다. 한 달 내내 한다지만 일반인들이 볼만한 날은 7월 17일의 가마행렬이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는 “어령회(御靈會)”를 지낸 데서부터 기온마츠리는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사노미코토가 신라의 우두신이란 기록이 있다.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中の朝鮮)》을 쓴 박종명 씨는 서기 656년 가라쿠니(韓國)의 대사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가 일본에 건너올 때 신라국 우두(牛頭)에 계시는 스사노미코토를 모시고 와 제사를 지낸 것이 그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