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문화신문=석화 시인] *언녕 : 진작, 좀더 일찍이 < 해설 > 중국 조선족 3세인 시인 석화는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연변문학》 편집을 맡게 된다. 등단과 함께 “아리랑문학상”, “압록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연변조선족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 매김을 확실히 했다. 시인 석화는 다른 연변조선족시인들에 비해 다채로운 시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유리컵과 사랑학 개론”, 이 시이라든가 “작품” 연작시가 그것인데 이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참신성과 기발한 소재채택에서 자본주의로 가고 있는 연변의 문화를 체함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연변조선족사회에서 그의 시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예술이란 그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내 것으로 하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쉽게 서정이라 불리는 자칫 무력한 시풍에서 벗어나 사물을 기호화하고 끊임없이 뻗어 가는 정신세계를 시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은 그래서 귀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는 시인의 언어적 탐구가 외적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가감승제와 방정식 ―작품 36 철근+시멘트+타일+…+땅=벽체 벽체 X 유리 X 페인트 X … X 하늘=빌딩 √빌딩․³√빈병․⁴√소음․…․ⁿ√물=도시 도시÷문패÷전화번호÷…÷공기=사람 사람―사랑―진정―…―달나라=X <해설> 다양한 수학공식을 패러디한 이 시는 이상의 일련의 시들을 연상하리만치 전형적인 패러디 시로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시의 제1행은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철근, 시멘트, 타일과 같은 건축재들을 땅 위에 적절하게 세워놓으면 벽체가 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제2행에서는 많은 벽체, 유리의 복합물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 수식을 하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것이 빌딩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빌딩에 그 빌딩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빈병 같은 쓰레기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과 같은 공해 및 자연으로서의 강물, 눈, 비와 인간이 만들어낸 폐수까지의 복잡한 혼합물이 도시의 풍경을 이룬다. 그런 도시 가운데 마치 이름처럼 인간에게 부여된 문패나 전화번호를 가려내면 사람이 된다. 여기에서의 사람은 어느 특정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고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탑 에 게 다 같이 땅 위에 사는 주제에 왜 자꾸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이냐 버러지들은 버리지만큼의 하늘을 토끼는 그의 모두뜀에 알맞은 하늘을 날개 가진 참새나 제비도 저만큼씩 맞춤한 하늘을 가졌을 뿐인데 왜 자꾸만 하늘이 낮다고 또 높다고 삿대질이냐 천 년 전부터 또 후에까지 목제, 석제, 철제… 숲처럼 일어선 탑 일어설 탑 그 끝에 찔리어 멍이 든 하늘 퍼렇게 구겨져 있는 저 하늘 찢어질듯 펄럭거릴 저기 저 하늘 <해 설> 시인이 가진 “버림”의 시학실천은 도시화에 따른 피폐된 사회상과 기형화되고 팽창 되어가는 인간들의 물욕에 대해서도 의문과 아픔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 “탑에게” 등이 바로 그런 주제의식에 바쳐진 작품들이다. 시 “탑에게”는 도시문명이 생태환경에 대한 파괴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멍이 든 하늘”, “퍼렇게 구겨져 있는 저 하늘”에 대한 아픔을 통하여 아름다워야만 할 무욕의 세계가 파탄되어감에 하소연을 보내고 있다. 훌륭한 시인은 창조된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 석화는 도도한 시적 선언을 하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처절한 살신성인 ‘퓨즈론’ – 연변 6 냉장고든 전자레인지든 TV 또는 오디오든 괜찮은 물건들에는 다 있다 사람의 그것처럼 은근히 부끄럼 타는 그것은 물건들의 뒷부분 엉덩이 쪽에 숨어있다 구석진 곳에 코 박혀 숨이 칵칵 막혀도 빛 한줄기 못보고 먼지만 쌓여가도 처절한 “살신성인” 단 한순간의 사명을 위하여 인내하는 전류든 전압이든 과부하가 걸릴 때 제가 먼저 새카맣게 타서 끊어져 버리는 퓨즈는 가전제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냉장고가 다시 찬바람 내고 TV가 다시 꿈같은 오색의 세계 펼쳐주고 제 몫을 다한 그것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때 예민한 센스 때문에 제 몸 먼저 태우는 퓨즈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안다. 해설 석화 시인은 기술문명의 중심부에 서서 인간관계의 병리현상을 통해 사람과 자연 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석화 시인의 문학적 기반이라는 것은 그의 시 “퓨즈론 –연변 ․6”에서 확인되고 있다. “제 몫을 다한” 냉장고, 전자레인지, TV, 오디오 등의 물건이 폐기물 처리장으로 실려 가듯이 오늘날 시장경제의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도라지 ―연변ㆍ8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연길 네거리에 내려와서 칼라 도라지로 변신 하였대요 싸리나무 꼬챙이에 꿰인 채로 순진한 촌티 내며 서로 껴안고 동시장 서시장에 몰려있을 때가 첫 걸음이었고 수돗물에 알뜰히 가랑이 씻겨 “경희궁”, “경복궁”에 “서울한식관” 쟁반마다 하나 둘씩 담겨 나가는 것 둘째 걸음이래요 내친걸음 한 달음 확 달려가 된장, 고추장에 식초라 간장 맵고 짜고 시고 단 온갖 것들 뒤집어쓰더니 지지고 볶이고 무치고 데워져 세상의 구미에 맛들어져 가는 것이 넷째 다섯째 걸음이라나요 그 다음엔 해가 진 뒷골목 가로등도 희미한 모퉁이에까지 막 가버려 자정 넘은 노래방 빈 방에서는 가사 없는 우리민요 “도라지” 노래가 반주곡 멜로디로만 울리고 우리말을 잘 못하는 한족사람들이 “또라지, 또라지”* 이렇게 따라 부르더라고요. 도라진지 또라진지 모르겠지만 심심산천에는 백도라지요 연길 네거리엔 칼라 도라지, 또라진가 봐요. * 주: “또라지”라는 발음은 중국어로 “쓰레기를 버리다”라는 뜻인 “倒垃圾(daolaji)”라는 말이다. <해 설> 석화의 아닌 보살하고 슬쩍 튕기는 능청스러운 유머는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피 안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한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레 바라다 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 싶지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지만 지금은 그냥 그저 건너가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까 해설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론 지극히 일차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동명의 이름을 가졌다는 남다른 친근함으로 그가 가진 시의 눈과 마음과 심장을 열어보기로 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나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길이라는 지역을 탐험하며 조심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코스모스 - 누나에게1 누구와의 약속이었기에 모두가 떠나는 계절 뒤끝에 오히려 긴목을 하고 피어있는 것인가 코스모스여 한줄기 들길은 가을하늘 아래로 아득히 사라지고 이젠 아무도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길섶에 조용한 웃음으로 그래도 피어있는 코스모스여 작은 꽃잎마다에 지난밤 별들의 눈물자국 같은 이슬방울의 흔적이 남아 길 잃은 나비 한 마리 불러 다리쉼 시키려는가 코스모스여 시절 앞에 피어남도 화사한 뽐냄도 다 그네들 여느 꽃의 제멋 한 생이 천년이런 듯한 주먹만 한 조약돌 곁에서 이 늦은 계절에 엷은 향기 얹어주는 코스모스여 어느 통속잡지 뒤표지에도 오른 적 없는 내 시골누이 같은 코스모스여 하나의 약속을 한 송이 꽃으로 피울 줄 아는 안쓰러움이여 < 해 설 > 석화 시를 이해하고 사귀자면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누나”라는 낱말이다. 시인 석화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시적 대상물로서의 이 낱말은 시인이 꾀하고 있는 인생추구와 인간완성에 있어서 자못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알아보는 데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도 “-”도 아닌 “연변표” 아줌마 석화시 감상과 해설 19 아줌마는 아주머니의 준말이다 ‘아주머니는 아와 주머니의 합성어이다’라는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언어학자 렴광호 박사와 물어보면 알겠지만 아줌마는 어쩔 수없이 아줌마다 옛날에 앞뒤가 구별 안 되는 “몸뻬”바지와 코신에 그리고 요즘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머리에 쓰고 있지만 대체로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비슷하게 평평한 립방체로 절반하늘이 아닌 옹근하늘을 든든히 받치고 서있는 아줌마는 어쨌든 아줌마다 해와 달이 뜨고 음과 양으로 나뉘는 이원적인 세상에서 “+”도 “-”도 아닌 존재로 인류 속에 나타나 수많은 과학자들의 머리카락을 새하얗게 한다는 아줌마는 역시 아줌마다 아줌마 아줌마 중에 “연변표” 아줌마는 이 세상 아줌마 중에서도 희귀품이라 한다. < 해 설 > “〈연변표〉아줌마 ―연변․3”의 시적대상은 희화(戱畵)화되고 부호화된 인물이다. “〈몸뻬〉바지와 코신에”,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머리에 쓰고”,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비슷하게 평평한 입방체”가 외모적인 파악이라면 “절반 하늘이 아닌 옹근 하늘을 든든히 받치고 서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가을하늘, 어느 분의 손길이 스쳐갔을까? 어느 분의 손길이 스쳐갔기에 저처럼 말쑥하게 닦여졌을까 한 점 티도 없는 옥색 하늘 가진 것 모두다 비어내고서 푸르청청 높게도 열린 가을 하늘 어느 분의 손길이 스쳐갔을까 해설 시인 석화는 생명 시학에 대한 진지한 추구로부터 인간을 자연속의 생명체로 관찰하였다. 하기에 그는 자연의 모든 생명에서 인간생명의 연속과 참뜻을 확인하였는바 푸르른 하늘과 출렁이는 바다와 강물, 무성한 숲과 한그루의 꽃과 나무,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돌, 나는 새와 바람과 구름 등등 모든 자연의 물상들을 인간과 함께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보았고 그 속에서 인간생명의 의의를 확인하였다. “가을”, “하늘”은 시인에 의하여 창조된 무욕의 이미지로 되어있다. 시 “가을하늘” 등에서는 “버림”의 영원성과 아름다움, “버리지 못함”의 자책과 부끄러움이 표현되어있다. 가을 하늘은 무르익은 만물로 하여 가장 큰 영예의 소유자로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진 것 모두다 비어내고” 있다. 그것은 그대로 무욕의 세계요, 버림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하여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기도 하다. 무욕의 세계인 가을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78.2”와 “173”이 네가 아니냐? “1,2,3,4,5,6,7,8,9,10” 이 차례로 나와서 “너는 수자다”라고 한다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22401580704***”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0433-256-219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78.2와 173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계속 아니라고 한다면 “78.2”에서 한 “10”쯤 덜어 내겠다고 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면 “173’에서 한 “10”쯤 낮추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허참 “10,9,8,7,6,5,4,3,2,1”이 거꾸로 나와서 ‘너는 수자다”라고 한다 이제는 “아니다”라고 못 하겠다 그러면 영영 지워버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0.0…” < 해 설 > 시인이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점점 왜소해지고 소외되어 설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외는 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공동이 앓고 있는 치유되기 어려운 병이다. 인간의 소외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지만 시인은 “협박(1996. 11. 10) ―작품39”에서 나름대로 숫자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심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