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는 경로의 날(敬老の日)이 있는 데 9월 셋째 월요일 (9월 21일)이다. 1948년에 국민 경축일에 관한 법률로 정한 이 날의 취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에 헌신한 노인을 공경하고 장수를 축하하는 뜻에서 제정했다고 한다. 법률로 제정하기 이전에 경로의 날의 시작은 효고현 노마다니무라(野間谷村)에 사는 카도와끼 마사오라는 촌장에 의해서 비롯된다. 그는 노인을 소중히 여기고 나이든 분들의 지혜를 빌려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9월 중순으로 날을 잡아 동네 노인들을 대접 하게 된 것이 계기다.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경로잔치는 효고현 전체로 퍼졌고 이어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처음에는 나이든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잔치를 벌였으나 썩 좋은 말이 아니라는 여론이 일어 노인의 날로 바꾸었다가 다시 지금의 경로의 날로 정착하게 되었다. 어머니날처럼 서양에서 수입된 경축일이 아닌 일본 고유의 노인공경의 날을 일본에서는 높이 치고 있다. ▲ 일본 경로의날 선물로 남성은 술, 여성은 꽃을 좋아한다. 일설엔 7세기 인물인 성덕태자가 사천왕사에서 비전원(悲田院, 불교의 자비를 베푸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일본의 된장을 미소라고 하는데 그 색깔은 한국의 누런 된장보다 밝고 연한 노란색에 가까운 느낌이다. 한국인에게 된장국이 필수라면 일본인에게는 미소시루(일본된장국)가 필수다. 두 나라 된장국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맛은 서로 다르다. 같은 된장국이라도 일본의 미소시루는 건더기가 별로 없이 후루룩 국그릇을 들고 마실 정도의 느낌이라면 한국의 된장국은 밥을 말아 수저로 먹어야 제 맛을 느낄 만큼 된장국에 들어 있는 건더기도 다르다. 일본의 미소와 한국의 된장 요리 가운데 결정적인 차이를 들라하면 일본의 미소로는 미소찌개를 만들어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의 된장으로는 된장국도 끓이고 된장찌개도 만들어 먹는 점이 다르다. 미소시루만 먹다가 한국에서 된장국이나 된장찌개를 맛본 일본인들의 반응은 한국 고유 된장맛이라면서도 대체적으로 짜다는 평을 하고 있다. 일본의 일반 미소는 샛노란 색깔에 가깝지만 핫쵸미소는 그 색깔이 짙고 붉은 빛이을 도는 게 특징이다. 적갈색의 핫쵸미소의 고장은 나고야지방인 아이치현(愛知縣)이다. 나고야지방에서 맛보는 미소시루는 다른 지방의 미소시루보다는 색이 짙고 맛도 깊다. 이 지방에서는 핫쵸미소와 구분하기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전이 반드시 만능은 아니란 걸 알고도 낙담하기는커녕 애착이 점점 깊어갔다. 가려운 곳에 손이 채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부분마저도 애쓰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절대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핏 보면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미우라시온은《배를 엮다(船を編む)》라는 책에서 사전 만드는 작업의 어려움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사전 만드는 작업이야 말로 낱말 하나하나를 날실과 씨실처럼 꿰어야하는 작업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올해 마흔 살의 작가 미우라시온은 와세다출신으로 취직을 위해 20개 회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경험을 바탕으로《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이란 소설을 쓰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 미우라시온의《배를 엮다(船を編む)》책 표지 숱한 이력서를 들고 취직을 위해 뛰면서 겪은 이야기야 누가 쓰던 오십보백보의 이야기지만 미우라시온의 《배를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 살면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특히 연말연시에 보내는 연하장(年賀狀, 넨가죠)과 한 여름 무더위에 보내는 안부편지인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도 꼭 챙겨야할 것들이다. 물론 젊은 세대는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이런 것들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의 여름철 풍경이라 하면 쇼츄미마이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쇼츄미마이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편지는 대개 엽서를 보내는데 엽서에는 파도치는 그림이라든가, 시원한 계곡 그림, 헤엄치는 금붕어 등이 그려져 있어 엽서를 받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게 배려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대관절 언제 쇼추미마이를 보내면 좋을까? 일본 누리꾼들도 이 점에 대해 궁금한 모양인지 언제 보내야 하나? 라는 질문을 인터넷에 많이 올리고 있다. 쇼츄미마이를 보내는 때는 보통 장마가 갠 뒤 소서(小暑)부터 대서(大暑) 사이에 많이 보내는데 반드시 이때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입추까지 보내면 무난하며 이때까지는 안부 편지 앞머리에 맹서(猛暑)라는 말들을 쓴다. 바쁜 일이 있어 이때 못 보내고 이 이후에 보내면 잔서(殘暑)라는
[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죽은 아버지의 유품이 71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느낌이들까? 올해 78살인 사사키 씨는 27일 7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 유품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사사키 씨 아버지의 유품은 대어기(大漁旗)로 출어시에 고기잡이배에 꽂는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인 그의 아버지 미우라 씨는 태평양전쟁 때 구일본군에 징용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군수송선겸 감시선용으로 자신의 배가 차출되자 기관장으로 전장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어선은 곧 침몰하게 되고 침몰한 어선에서 한 미국인이 이 깃발을 건져 보관해 오던 것을 미야자키현에 주소를 둔 미우라(三浦三之助)씨 딸인 사사키사요코(78살)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깃발을 보관해온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주에 사는 전 미군사무원이자 화가인 피터 럿쉬 씨(93살)로 그는 태평양전쟁 중 침몰한 일본배에서 이 깃발을 회수한 지인을 통해 이 깃발을 입수하여 보관해왔다고 한다. 대어기(大漁旗)는 가로 190센티, 세로 140센티 크기인데 이 깃발에는 텐요마루(天洋丸)의 미우라(三浦三之助)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번에 그 가족의 품에 반환될 수 있었다. 럿쉬 씨는 이 깃발을 1942년 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우리에게 좀 낯선 말이지만 실심실학(實心實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실심실학자를 꼽는다면 양명학 연구를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운 하곡 정제두 (鄭齊斗, 1649-1736) 선생을 꼽을 수 있다. 하곡 선생이 말하는 학문 곧 실심학문이란 외적인 남의 학설로 기준(定理)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내적인 기준(良知)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실심은 생명이 약동하는 실상과 원리(生理)를 참되게(眞理) 그대로 나타내는 마음이며, 그의 학문은 명분과 대의를 내세워 죽음으로 내모는 의리학(義理學)이 아니라 생명의 내실과 그 원리를 중시하는 삶의 학문(仁學)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일본에도 그러한 실심실학자가 있다. 도쿠가와시대의 인물인 구마자와반잔(熊沢番山, 1619-1691)과 미우라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을 들 수 있다. 구마자와반잔은 17세기 오카야마번에서 봉사하면서 치산치수 사업을 했는데 그는 산림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신념으로 치산치수에 노력하였다. 구마자와는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무엇이나 배우는 정심수신(正心修身)의 자세로 실학을 실천한 실심실학자였다. ▲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將軍)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2회 방문은 교토의 후시미(伏見), 제12회 방문은 쓰시마(馬)까지였으나, 그 밖에는 모두 에도까지 왕복하였고 제4회 부터 제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員)의원(院)역관(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큰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戶)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에 이르는 긴 여정 길에 올랐다. 조선통신사는 정사 외에 곳곳에서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다. 여기서 1636년의 기록을 보자. 때는 인조 14년 8월 11일. 통신사 일행은 한강을 출발하여 수로와 육로를 거쳐 9월 6일 부산에 도착, 여러 준비를 거쳐 10월 6일 부산을 출발했다. 이후 대마도를 거쳐 10월 27일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이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시에 살다 보면 인구감소니 인구위기론 같은 말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침 출근시간의 교통지옥 속에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실감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웃나라 일본에 바로 그 심각한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 앞 다투어 나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특히 중앙공론 2014년 6월호 등에는 이러한 인구감소가 예견되는 시정촌(市町村, 우리의 시읍면) 523곳을 발표하여 일본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홍수 같은 물난리가 아니라 인구가 빠져나가 도시가 폐허화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일본은 이미 중소도시의 인구감소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그 대책을 위한 작업에 머리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대책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 골칫거리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기업가를 응원하는 미디어인 Future League 지에 실린 이케다하야토 씨의 기고문이 눈길을 끈다. 이케다 씨는 오랜 기간 북적대는 동경에 살다가 은퇴 후 조용한 삶을 보내고자 동경에서 머나먼 고치현(高知)으로 이사했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케다 씨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정착한 마을의 쇠퇴보다도 대도시의 베드타운 도시를 걱정하고 있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5월 25일자 AFP 일본통신은 호주 멜보른 근교에서 희귀한 흰색 제비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조류전문가로 환경교육지도자인 밥윈터스 (Bob Winters) 씨가 어렵사리 흰색 제비를 찍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는 선천성색소결필증 제비라고 했다. 순백색의 제비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것으로 현지 언론은 2010년 영국에서 보고 된 것 외에 손에 꼽을 만큼 희귀종이라는 반응이다. 현대 조류학의 눈으로 보면 순백색 제비는 정상이 아닌 새지만 희귀성으로 보면 무척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발견된 흰색 제비 이야기를 듣자니 고대 일본의 흰 꿩 이야기가 생각난다. 흰 꿩이 등장하여 나라의 연호를 백치(白雉, 하쿠치)라고 한 왕은 효덕왕(孝德天皇)이다. 서기 650년 2월 9일 나가토(長門, 지금의 야마구치현) 지방에서 국사(國司)인 쿠사카베가 흰 꿩을 잡아 효덕왕에게 바쳤다. 백치 연호를 쓴 기간은 4년 정도뿐이지만 조정에서는 쿠사카베가 오노야마에서 잡아 헌상한 휜 꿩을 보고 조정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 날 것으로 생각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연호(일본에서는 원호라 함)를 백치라고 하였다. ▲ 효덕왕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서기 703년 5월 28일 종5위 신분의 신라대사 미노연정마려(美努連淨麻呂)와 학문승 의법(義法), 의기(義基), 자정(慈定), 정달(淨達) 등이 신라로부터 귀국했다. 이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의 승려들이 신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속일본기》에는 이 무렵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 백제인들과의 교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발해사신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와 있다. 이 보다 앞서 1월 5일에는 신라에서 김복호(金福護, 신라관직 제8위)와 김효원(金孝元, 신라관직 제9위)등이 효소왕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4월 4일에는 종5위인 고려(고구려) 약광(若光)에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 고구려의 약광왕을 모신 신사가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있는 고마진쟈(高麗神社)이다. 머나먼 2천 년 전 유구한 세월 동아시아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 여러 나라들의 맹공을 저지하는 강국이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지(英知)룰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나라. 먼 이국땅에서 넘어온 왕족 고구려왕 약광(高麗王 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