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독자여러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소서!!! < 우리문화신문 모두 드림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는 창경궁 풍기대(풍향을 관측하기 위해 깃발을 꽂아두는 받침돌) 주변에 대형 달 모형을 설치해 보름달을 연출한 ‘궁궐에 내려온 보름달’ 행사를 오는 12일부터 22일까지 열흘간 운영한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 딸림 행사도 함께 열릴 예정인데 특히 창경궁 대온실 앞에서 ‘달밤의 과학’을 엽니다. ‘달밤의 과학’은 달, 목성, 토성과 가을철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어 가을로 들어선 궁궐의 자연 속에서 역사와 과학문화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달은 고래등같이 덩실한 기와집 추녀 끝에 보름달로 걸터앉아서 토끼와 계수나무의 꿈이 되고 옛 구리거울의 그리움이 되고 은쟁반에 흘러넘치는 서러움이 되고 하였는데 여기 도시에서는 색 바래고 구겨진 광고종이 한 조각처럼 깜박거리는 네온등의 오색불빛에 파리해져버린 밤하늘 저켠에 겨우 붙어있습니다.” 중국 연변의 동포 석화 시인은 그의 시 “도시의 달 –누나에게”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보름달을 보고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었지요. 어려웠던 시절에는 방아 찧는 상상만 해도 배가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명절이 명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 귀신 떡 먹듯 한다. / 귀신에게 비는 데는 시루떡이 제일이다. / 아닌 밤중에 웬 찰시루떡이냐? / 귀신은 떡으로 사귀고 사람은 정으로 사귄다. / 떡 본 귀신이다. /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 떡이 있어야 굿도 한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유난히 떡과 관련한 속담이 많습니다. 이틀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우리 겨레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혼인이나 아기의 돌잔치 때에도 떡을 해먹었지요. 그런가하면 제사 때도 떡이 쓰였으니 떡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습니다. 그 가운데 송편은 대표적인 한가위 음식입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인 1849년에 펴낸 《동국세시기》에 한가위 때면 햇벼로 만든 햅쌀 송편을 먹는다고 했고, 1925년에 펴낸 《해동죽지》에도 한가위에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위와 송편의 관련 기록은 주로 근대 문헌에 보일 뿐입니다. 예전의 문헌 기록들을 보면 계절에 관계없이 특별한 날이면 빚어 먹던 겨레의 으뜸 떡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19세기 초반의 문집인 《추재집》에는 정월 대보름에 송편을 놓고 차례를 지낸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흘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 한가위 큰 명절의 각종 세시풍속 가운데는 '거북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거북놀이는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처럼 엮어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어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입니다.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가 집집을 방문하지요. 대문을 들어서면서 문굿으로 시작하여 마당, 조왕(부엌), 장독대, 곳간, 마구간, 뒷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들보 밑에서 성주풀이를 합니다. 조왕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면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 하면서 비나리를 하지요. 이렇게 집집이 돌 때 주인은 곡식이나 돈을 형편껏, 성의껏 내놓는데이것을 공동기금으로 잘 두었다가 마을의 큰일에 씁니다. 이와 같이 거북이놀이와 성주풀이는 풍물굿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또 재미있는 놀이로 전남 진도의 “밭고랑기기”가 있지요. “밭고랑기기”는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고랑을 깁니다. 이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로 많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지금 남아 전하는 채용신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은 사대부상과 유학자상입니다. 특히 채용신이 을사늑약으로 군수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뒤로는 74살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킨 항일의병장 최익현(崔益鉉)과 최익현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임병찬(林炳贊)과 김직술(金直述), 조선 말기의 의병장 기우만,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썼으며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黃玹) 등 우국지사들이 많지요. 채용신은 그 가운데서도 최익현의 초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렸는데 1905년에 그린 74살의 <최익현상>은 가장 눈에 띄는 그림입니다. 최익현은 유학자들의 옷 심의(深衣)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나이가 많은 노인임에도 굳은 의기가 서려 보입니다. 미술평론가 조정육 선생은 이 초상화에 대해 “결코 과장되거나 꾸미지 않는 표현법은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잘 살아 있어 마치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 가슴을 뭉클하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는 ‘면암최선생칠십사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가위’는 우리 겨레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날입니다. 조선 후기 한양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 있는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햇곡식과 과일들이 풍성한 좋은 절기입니다. 명절 한가위는 음력 팔월 보름날인데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 등으로 부르지요. 이 가운데 요즈음 너도나도 쓰는 말은 ‘추석’입니다. 신문 기사나 광고도 거의 추석이 대세입니다. 그런데 ‘추석(秋夕)’은 5세기 때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天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니 우리의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지요.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추석'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와 달리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우리말로 8월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지요.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베짜기)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신라 유리왕 9년에 나라 안 부녀자들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남 보은의 동광초등학교가 지난 5월 보은군 수한면에 있는 보은대추한과 만들기 체험장에서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통한과 만들기 체험을 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앞치마를 입은 뒤 개인 틀 위에 바삭한 쌀과 조청을 섞은 덩어리를 골고루 펴고 눌러서 틀에 맞게 채운 후 밀대로 납작하게 밀어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과를 떼어 식히는 과정으로 한과를 만들며 즐거워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우리 겨레의 큰 명절 한가위가 다가옵니다. 그래서 명절 선물로 한과가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과는 흔히 유밀과(油蜜菓)를 뜻하는데 유밀과는 한과 가운데 가장 사치스럽고 귀한 것으로 밀가루를 꿀과 기름으로 반죽해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튀긴 다음 다시 꿀을 바르고 계핏가루를 뿌린 과자입니다. 그런데 유밀과는 각종 과일이나 생강ㆍ연근ㆍ당근ㆍ인삼 따위를 꿀이나 설탕에 재거나 조려서 만든 ‘정과(正果)’, 차를 마실 때 곁들이는 ‘다식(茶食)’, 밤ㆍ대추와 같은 과실을 꿀로 달게 하여 만든 ‘숙실과(熟實果)’, 신맛이 나는 앵두ㆍ모과ㆍ살구 따위의 과육에 꿀을 넣고 졸여서 굳힌 ‘과편(果片)’ 따위를 포함한 전통과자를 함께 말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4월 3일 문화재청은 ‘전통어로방식(고기잡이) - 어살(漁箭)’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38-1호로 지정했습니다. 이 ‘전통고기잡이 - 어살(漁箭)’은 어촌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어업문화로서, 대나무 발 등을 치거나 돌을 쌓아서 밀물 때 몰려들었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고기를 잡는 고기잡이 도구[漁具] 또는 고기잡이 방법을 말합니다. ‘어살(漁箭)’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고려 시대 문헌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제527호)에 실린 ‘고기잡이’에 나타나 있듯이, ‘어살’은 조선 시대까지 연안어업(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서 하는 고기잡이)을 대표하였지요. 그러나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어살’의 사례로는 남해군 지족해협과 사천시 마도ㆍ저도 같은 곳에 설치된 죽방렴을 이용한 멸치잡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전통고기잡이 – 어살(漁箭)’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것은 자연과 생태환경에 대한 이해, 물고기의 습성, 계절과 물때를 살펴 물고기를 잡는 어민들의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판소리 “흥부가” 가운데 “화초장 타령”을 보면 놀부가 흥부네 집에 가서 화려한 모습의 화초장을 빼앗아 짊어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겨레는 이렇게 판소리에 등장할 만큼 장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롱(欌籠)이란 장(欌)과 농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여러 층이 있어 층별로 분리되는 농(籠)과 옆널이 하나로 붙어 있는 장(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의생활의 변화에 따라 농보다는 장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고, 뒤늦게 발달한 의걸이장의 예에서와 같이 수납가구가 장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장ㆍ농의 구분도 모호해졌지요. 장롱의 종류를 쓰임새 별로 보면 버선장, 실장, 이불장, 의걸이장 등이 있으며, 재료에 따라서는 화류장(자단나무), 화각장(소뿔), 죽장(대나무), 자개장(나전), 비단장, 화초장, 주칠장(붉은빛의 물감), 삿자리장(갈대), 지장(종이), 먹감나무장, 용목장(느티나무나 물푸레나무), 오동나무장 따위가 있습니다. 또 꾸밈에 따른 장으로는 원앙삼층장, 나비삼층장, 난초장 같은 것들이 있지요. 한편 장롱은 남성들이 쓰는 장과 여성들이 쓰는 장으로 나눌 수도 있는데 사랑방에서 주로 남성들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지요. 그 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몸부림을 쳤습니다만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합니다. 그리고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킵니다. 그리고는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제1조)"는 조항이 담긴 합병조약을 통과시키고, 8월 29일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넘기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피눈물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8월 28일 치 노컷뉴스에는 “경술국치 조기게양 운동 확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가운데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