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왕조는 개국 484년 만인 1876년 나라의 빗장을 열었다. 그 뒤 1880년대에 들어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격랑의 시대에 집권 보수 사대파는 뭐든지 청나라의 그늘 속에 안주하려 하였다. 집권층은 큰 나라로부터 자주독립하려는 생각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적대시했다. 그들의 적이 바로 개화파였다.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개혁을 서둘렀다. 낡은 봉건왕조를 뜯어고쳐 재단장하려는 그들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훗날 일제에 강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친일논쟁을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보수 사대파의 철옹성 같은 장벽과 야수와 같은 외세의 도전 속에 놓인 조선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절감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혁명가들이었다. 민중을 계몽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조선을 구하려 했다. 그들은 소수였고 권력도 없었다. 그들을 적대시하는 보수 사대파는 청나라를 뒷배로 삼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개화파 혁명가들이 품었던 갈망은 조선의 자주독립, 그것이었다. 서재필의 말이다. “그때 김옥균의 생각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동경 주재 영국 엘리트 외교관 사토우(Satow)가 고베 주재 동료 외교관 스톤(Aston)에게 보낸 1881년 8월 23일 자 편지다. “이동인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는 정말로 미로운 인물이니까요. 만일 목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 나라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겁니다. (I hope the information that Tong-in has arrived at Nagasaki may prove to be correct, for he is really a very interesting man and if he can keep his head on his shoulders, pretty sure to make his mark in the history of his country.)” 사토우는 다음 해인 1882년 6월 12일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김옥균, 서광범 그리고 탁정식과 저녁식사를 하다. 그들은 매우 서글서글하고 입담이 좋다. 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이다. 이태리 피에몬트(Piedmont)인과 피렌체 사람이 대조적이듯이 그런 인상을 준다.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