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굿춤은 종교적 목적으로 추는 의례춤이다. 무당이 소정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의 기(氣)를 상승시켜 신을 기쁘게 하거나 죽은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추어지는 신앙 행위의 춤인 것이다. 황홀경에 도취한 신바람의 율동은 굿춤의 결정체이며, 혼돈과 세속적 질서를 깨트려 삶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어 신탁을 받는다. 그리하여 활력을 재생산하여 삶의 활력소를 갖도록 하는 것이 굿춤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죽은 망자의 한을 달랜 뒤 저승문을 열어서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굿춤이 추어진다. 이와 같은 신앙의례의 굿춤을 춤 예술로 전환하여 세간에 소개한 박병천의 굿춤은 제석춤, 지전춤, 고풀이춤이다. 미학적 율동을 앞세워 무대예술로 등극한 이러한 춤은 삶의 정서와 관념을 담론화하여 예술 미학의 극치를 드높인다. 제석춤은 인간의 재복, 수명, 자손 점지를 관장하는 제석신의 춤이다. 환인, 환웅, 단군왕검 등 삼신의 제석은 존엄함의 상징이기에 제석춤 또한 엄숙함과 위엄성의 극치를 표출한다. 이러한 신앙적 제석춤을 신명적 흥과 미학적 멋을 불어 넣어 예술 춤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종이로 오려 만든 지전(紙錢)을 들고 죽은 망자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무송(舞松) 박병천(朴秉千, 1933∼2007)은 전라남도 진도 세습무가 자손으로 태어나 74살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박병천의 종조부 박종기는 대금산조 창시자이며 당숙 박만준은 피리 명인이었고 어머니 김소심과 고모 박선내는 당대 으뜸 세습무였다. 무속 집안을 배경으로 태어난 박병천은 어려서부터 가문 전통에 따라 어정판(굿판)을 따라다니며 소리를 배우고 춤과 장단을 익혔다. 악기와 재담은 물론이고 놀이와 향토문화를 배경으로 전승된 갖가지 민속예술을 두루 접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곱 살 때부터는 마을 농악대에서 무동 역할을 맡아 마을공동체 연희와 놀이를 습득하였고, 18살 때부터는 명인 박동준에게 가야금을 배웠으며, 명인 양태옥에게서는 진도 북놀이를 익혀 국악인으로서 소양을 터득했다. 30대에 명무 이매방에게도 전통춤을 학습하여 무대 춤이 갖는 예술적 깊이와 값어치를 간파하였다. 20세기를 맞이한 한국 사회는 전래한 민족문화와 들어온 외래문화의 대립과 공존 속에서 서로 간 갈등을 겪으며 융합되기도 하고 동화되기도 하였다. 유입된 것에 적응 또는 대응할 수 없는 전래의 것은 자리를 내주어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사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