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는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같은 해 9월, 국내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출범한 것을 기념하고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촉구하고자 대한민족대표 30인의 이름으로 10월 31일 발행된 활판 인쇄 전단지다. 당시 다이쇼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10월 31일에 맞춰 해당 문서들을 발표함으로써 3·1만세운동과 같은 전국적 시위운동을 다시 한번 펼쳐 일제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국내 곳곳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등 초기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문헌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나, 1967년 김양선(1907~1970) 교수가 숭실대학교에 기증하면서 유일한 실물 전단 형식의 문건이 알려졌다. 이 문서들은 3·1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당시의 독립운동 펼침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제79돌 광복절 행사가 정부 주최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주최 기념식으로 각각 열린 것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친일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반대하면서 따로 기념식을 단행했다. 윤석열 정부는 최근 말썽이 된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광복회는 논평을 통해 “1948년 이승만의 건국절 주장은 선열들의 피로 쓴 독립운동의 역사를 혀로 덮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세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첫째,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후유증일 것이다. 1948년 9월에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이승만의 방해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법에 따라 특별재판소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형 1명을 포함하여 12명밖에 안 되었다. 그마저도 실제 사형 집행은 1명도 없었고, 대부분 감형이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6,529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청 재판에 가장 먼저 끌려 나온 피고들은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광복절이 지났습니다. 광복은 1945년의 일이니 이제 79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에게 부끄럽게도 올해의 광복절은 정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회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치렀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행사를 나뉘어서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치욕적인 35년의 식민 지배 세월을 보냈습니다. 식민 통치를 일본처럼 혹독하고 잔인하게, 언어까지 빼앗은 국가 말살 정책을 편 나라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많은 독립투사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헌신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을 불러온 것은 안타깝게도 독립군의 무장봉기가 아니라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원자탄을 투하한 미국의 전쟁 승리 덕입니다. 그 결과로 분단과 신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지금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삼대가 굶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게 다가옵니다. 대체로 식민지를 겪고 독립한 나라의 지폐에는 독립투사가 한 명쯤은 표지모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독립투사들이 참으로 많은데도 지폐의 표지에 독립투사가 한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 본부(상임대표 이춘재)는 임시정부 수립 105돌ㆍ광복절 79돌을 맞이해 독립유공자후손들과 함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고 밝혔다. 고등학생 6명, 대학생 12명을 포함한 독립유공자후손 22명은 지난 12일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을 위해 중국 항주에 도착했다. 후손들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일본의 추적을 피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주 임시정부 청사와 김구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머물렀던 매만가 일대를 탐방했다. 이어 13일에는 독립운동의 기초를 만들었던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겼다. 독립유공자 김영우의 후손 김범준 학생은 “일본과 친일파의 추적을 피하는 너무나 힘든 삶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열정으로 수많은 고난을 견디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분들의 마음을 더 가까이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1919년 3월, 일본과 친일파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온 국민이 일어나 항거한 3·1만세운동이 이루어졌다. 이에 힘입어 동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는 4월 11일(목)은 일제에 나라를 침탈당하고 9년 뒤인 1919년, 중국 상해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국내에서는 이날, 정부를 비롯하여 전국 단위로 기념식을 열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는 한발 빠른 지난 6일(토, LA 현지시각) 낮 11시, ‘차세대들과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제105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연합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행사의 주최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 맡았고 주관은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LA흥사단, 화랑청소년재단, 국가원로회의미서부지부, 미주 3.1여성동지회가 맡았으며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와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의 특별후원으로 기념식이 열렸다. 주로스앤젤레스 김영완 총영사는 기념사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된 순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무장, 외교, 교육 등을 통한 투쟁은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물했습니다. 특히, 이곳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미주 한인들은 고단하고 어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도 독립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민족의식’이 단연 으뜸 되는 요소겠지만 다른 또 하나를 들라고 하면 ‘독립자금’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인물이 김호(金乎, 1884~1968, 1997년 독립장 추서) 애국지사다. 미주지역에서 활동한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가, 자립형 민족지도자, 털 없는 복숭아인 천도복숭아 개발자, 백만장자 독립운동가 등등 김호 지사에 대한 별칭이 많다.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어제(14일) 낮 2시, 서울특별시교육청 정독도서관(관장 이병호)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 김호 지사의 일생을 조명하는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 김호> 특별전 개막식 행사가 있었다. 개막식에서는 김호 지사의 외손자인 안형주 선생을 비롯하여, 신임 이종찬 광복회장의 축사가 있었고, 김호 지사가 졸업한 경기고등학교 김우경 교장과 구자철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 김호> 특별전은 1900년 고종이 설립한 첫 근대식 중등교육 기관인 관립중학교(현 경기고 전신) 제1회 입학생이자 제1회 졸업생인 독립운동가 김호 지사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