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예향의 도시, 전남 목포에서 개최되었던 <제27회 전국 국악경연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대회가 30여년의 연륜을 헤아리다보니 이제는 국악계나 문화예술계의 관심이 지대해 졌다는 이야기, 대통령상이 걸려있어서인가 참가자의 수준이 매우 높아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며 참가자 못지않게 지역 주민들이 대극장을 꽉 메우고 있어서 이미 지역의 축제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필자의 심사평은 발음이나 발성법, 명인 명창부의 경우, 선생의 흉내보다는 개성이 묻어나는 음악의 표출, 장단감과 강약의 조절이 매우 중요한 음악적 요소라는 점, 기악분야는 악기 잡는 법과 자세, 무용분야는 발동작이나 시선에 유의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심사위원의 점수는 즉시 화면으로 공개되어 신뢰를 높였으며, 진행요원들의 친절한 안내로 시종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였다는 점, 그리고 목포시의 유지들이나 특히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호응해 주는 축제의 장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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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국악중고등학교 개교 60돌을 기념한 종묘제례악 연주 모습 |
이번주에는 개교 60주년을 맞은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기념 연주회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이 음악회는 지난 9월 17일 <국립국악원>예악당에서 열렸다. 동문들과 재학생들은 물론, 관련기관이나 단체, 각급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는 사람들로 객석은 초만원이었다.
국악중고교는 지금으로부터 꼭 60년전인 1955년 4월에 제1회 입학생을 뽑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부터 국악고등학교라는 정식 교명을 갖고 시작된 학교가 아니라, 처음에는 국립국악원의 부설로 세워진 <국악사양성소>라는 이름이었고 교육연한은 6년제였다. 이름그대로 학교라기보다는 국악사(國樂士), 즉 국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사를 길러내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2년 국립국악원의 부설에서 독자적인 교육기관으로 독립을 하며 교명도 당당하게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소개하는 책자에 의하면 현재까지 4,97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매년 졸업생들의 80% 이상이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국내 최고의 음악대학에 입학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음악계, 무용계의 전통예술분야에서 충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
국악중고교 출신들 중에는 이름이 나 있는 대학교수, 인간문화재, 유명 연주가 등이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즐비하다. 실제로 이들이 한국의 전통음악계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차 이 난에서 국악고등학교의 설립배경이나 운영의 실제 등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악고등학교의 설립배경을 이야기 하려면 먼저 국립국악원의 개원부터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은 개원되었고, 이로부터 4년 뒤인 1955년에 국립국악원의 부설로 국악사양성소가 개소되었다. 국립국악원에서는 자체 운영도 어려운 시점에 왜 국악사양성소를 서둘러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까닭은 지극히 간단하다. 몇 안되는 국악사들로는 오랜 역사를 지켜온 전통의 음악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위기감과 그들이 점차 노쇠해 진다는 현실앞에 무엇보다도 먼저 후계자 양성을 서둘렀던 것이라 하겠다. 얼마나 시의적절하고 통찰력 있으며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는가 하는 점은 오늘의 국악계가 충분히 그 증명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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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국악중고등학교 개교 60돌을 기념으로 재학생 100여 명이 <천년>을 연주헸다. |
국악교교의 설립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이야기는 차차 계속해 나가기로 하고 우선은 이 날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악고등학교의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성의를 다해 준비한 연주회 이야기부터 해 보도록 하겠다.
기념 연주회는 첫 번째 순서로 종묘제례악 중에서 전폐희문과 영관을 연주하였다. 조선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셔놓은 종묘에서 신을 맞이한 뒤, 폐백을 드리는 의식에 쓰이는 음악이 곧 전폐음악으로 보태평의 첫 곡인 희문을 느리게 변주시킨 악곡이다. 또한 정대업 11곡의 마지막 악곡이 영관이다. 태평소와 대금(징)이 들어가 한결 장쾌한 분위기의 음악이다. 이들 음악은 마치 천상의 소리가 땅에 울리는 듯한 위엄을 갖춘 대악으로 이번 기념음악회의 막을 열어준 것이다.
두 번째 연주된 곡은 가곡의 마지막 곡인 태평가였다. 가곡을 부르는 형태는 남성에 의해 불려지는 남창, 여성에 의해 불려지는 여창, 남녀가 교대로 부르는 교창, 그리고 남녀가 함께 부르는 합창이 있는데, 태평가만이 합창으로 부르는 것이다. 김경배, 이동규의 남창과 김영기, 이승윤의 여창이 함께 부르는 어울림은 국내 최고의 음악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는 관악합주로 수제천을 연주했고 이어서 거문고산조와 궁중무용 처용무, 그리고 민속악의 대표적인 합주인 구음시나위가 연주되었다. 한 곡, 한 곡이 끝나고 시작될 때마나 객석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연주회를 위해 특별히 위촉된 창작관현악 <천년>은 국악고등학교의 재학생 100여명이 연주하였는데, 음악의 표현도 수준급이었으나 그보다는 음악을 대하는 학생들의 진지한 연주태도에 모두들 갈채를 보냈다.
이 날의 마지막을 장식한 음악은 관현악 <송광복(頌光復)>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광복의 기쁨을 국악기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곡은 1952년 국립국악원이 부산 피난지에 있을 때, 당시 35세의 젊은 국악사였던 죽헌 김기수선생에 의해 작곡되었는데, 3장 형식으로 된 작품이다. 1장은 상쾌하고 활기차게, 2장은 힘차게, 3장은 화려하게 연주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짓밟이던 어두운 과거를 벗어나 조국의 밝은 미래를 노래하는 선율과 장단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송광복 이외에도 선생의 관현악은 51년도에 <고향소>, 52년에 <정백혼>, 52년도에 <개천부>, 53년도에 <다시온 서울> 등이 있으나 송광복을 실질적인 국악창작곡의 효시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선생은 이러한 작품활동으로 53년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던 것이다.
국립국악고등학교의 개교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서를 100여명의 동문들이 모여 앉아 선생의 송광복을 연주한다는 자체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악계, 국악인, 국악중고교 동문이나 재학생 등 모두에게 여러가지 메세지를 담고 있는 의미있는 음악회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