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유적과 유물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에 이어 오키나와 까지 분포되어 있다. 몽골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삼별초,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삼별초는 강화를 포기하고 진도와 제주로 퇴각했는데 700년 전 고려의 보트 피플일 수 있다. [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고려의 왕도를 지키려 했던 마지막 만월대는 폐허로 변했다. 해양제국의 후예들은 뿔뿔이 흩어져 최근에 발굴되는 유적과 유물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찾는다는 것은 현실이 너무도 아쉽기만 하다.
고려의 뛰어난 건축예술들을 타임캡슐 속에서 겨우 만나는 듯하다. 현재 만월대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 가운데 한 부분이기도 하다. 남북이 힘을 모아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만월대와 고려 박물관을 2002년에 찾아 갈수 있었다. 성균관 자리에 있는 대성전 건물에 박물관을 열어서 고려의 숨결들을 한 눈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개경성
▲ 개성 만월대 발굴 사진(문화재청 제공)
▲ 개성 만월대 발굴 전 사진(문화재청 제공)
삼별초의 태동을 가져왔던 궁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숨결을 만날 수 있는 첫 관문은 아무래도 만월대라 하겠다. 918년 태조 왕건에 의해 나라가 세워지고 1361년 공민왕 10년, 홍건적에 의해 폐허가 되기까지 고려왕조의 발자취를 한 눈으로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궁성은 송악산 남쪽 기슭 해발 50미터의 산등성을 따라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다. 높고 낮은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은 1973∼1974년 발굴 조사에 이어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제3차 남북공동발굴조사와 연계하여 2014년 11월 공동발굴이 재개되어 올해 6월부터 11월말까지 남북이 공동발굴조사에 나섰다.
궁터의 기단들은 잘 가공된 화강암으로 축조됐는데 내부의 주춧돌과 장식돌은 석공들의 정교한 조각 기술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궁터에서는 왕족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터도 찾아냈다. 이밖에도 궁전 건축에 사용된 용마루 장식과 기와막새, 다양한 용도의 쇠못, 경첩과 함께 청자와 백자들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 실외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현화사 7층석탑과 개국사 석등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강화산성(江華山城)
1232년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1234년 본격적인 궁성 축조가 이루어졌다. 강화성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피난처로 전락하지만 개경성을 모방하여 궁성을 포함한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1711년에 세웠고,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
▲ 강화산성 모습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남아있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우 일파가 개성에서 1232년 강화로 도읍 하면서 1234년 1월 축성 시작 13년 걸려 쌓은 것이다. 동서남북문으로 배치된 성문들은 개성의 성문 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훼손된 것들을 1671년 개축했다. 흥선대원군과 광해군 유배지였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 침공으로 의궤(儀軌) 등이 약탈되었고,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와 일본의 강화도 조약 등이 있었던 역사 질곡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