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일제의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 이후의 국악계, 특히 암울했던 시기에 전통의 소리로 일반 대중을 위로해 주고, 또한 웃음을 전해준 박춘재 명창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구한말의 국립극장은 원각사였고 소속되어 있던 협률사는 지방을 전전하다가 광무대(光武臺)에서 구파극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1930년대, 광무대가 불타버린 이후, 광무대가 문을 닫기 이전까지의 경서도 소리나 재담은 박춘재(1883~1950)로 대표된다고 하였다.
그 까닭으로는 그가 이미 10대 후반에 고종임금으로부터 연예 감독관의 관직을 하사 받을 정도였었다는 점, 1920년대까지 출판된 각 종 잡가집에는 ‘광무대소리’, ‘조선제일류가객 박춘재군’, ‘박춘재소리명창’, ‘조선명창 박춘재군’ 등등의 글귀와 함께 그의 사진을 싣고 있어서 그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또 당시 박춘재는 조선의 잡가를 가장 먼저 녹음한 사람이며 가장 많은 노래를 녹음한 사람이고 가장 많이 팔린 음반도 그의 것이었다는 이야기, 국악계 일각에서는 박진홍을 중심으로 <박춘재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그의 생전 활동을 조명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물의 하나가 2011년에 출간된 김은신의 《조선일류가객-박춘재》는 책이며 연보도 소상하게 싣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조선일보에 실린 <전조선향토예술대회> 기사, 이동백, 이방울 등 당시 최고의 명창들과 나란히 박춘재 이름이 실렸다.(맨 아래)
박춘재 명창은 18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세 안팎에 소리를 가르치던 소리방 선생은 그의 재주를 범상히 여겨 더 큰 명창인 홍필원, 홍진원 형제에게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이 13, 4세 때에는 당대 <추, 조, 박>으로 유명했던 3인 중 가장 막내였던 박춘경 명창에게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배우게 된다. <추,조,박>이라는 말에서 <추>는 가곡, 시조의 명인이었던 추교신을 말하는 것이고, 조는 조기준으로 역시 가사와 시조에 명인이었다. 그리고 박은 박춘경으로 경서도민요나 긴잡가를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경기12잡가 가운데서 대표적인 노래로 알려져 있는 유산가(遊山歌)가 박춘경의 곡으로 전해오고 있는 점으로도 그의 명성은 자자하다. 옛 유산가는 사설이 길고 곡조도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는데, 박춘경이 앞의 부분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화란춘성(和蘭春城)하고 만화방창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를 구경을 가세”로 시작부분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위 3인 중 나이는 박춘경이 가장 아래였으며 박춘경의 스승이 바로 조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조기준은 여러 제자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학강 최경식과 박춘경이 유명하다. 박춘경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박춘재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참고로 최경식은 잡가도 누구 못지 않게 능하였으나 여간해서는 부르지 않았다고 전하며 그의 제자들 중에는 최정식, 유개동, 박인섭, 김태봉, 정득만, 김순태, 이창배 등이 이름을 날렸다.
이처럼 박춘재는 당대 잡가나 민요의 대가였던 박춘경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는 선생의 소리를 한번 들으면 선생이 놀랄 정도로 그대로 불렀다고 한다. 받아들이는 감각이 남달랐기에 배우는 속도가 빨랐으며 남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경서도 소리의 대부분을 잘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3년 후인, 15~6세의 나이로 궁중에 들어가 가무별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가무별감이란 일종의 연예 감독관 같은 관직인데, 얼마나 노래를 잘 불렀으면 젊은 그를 기용했을까? 일제의 간악한 요구에 마음을 잃고 있던 고종의 마음을 어떠한 소리로, 또는 어떤 재담으로 움직였기에 관직을 얻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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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살의 박춘재, 고종황제로부터 가무별감 벼슬을 받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그의 나이 20세가 되면서부터는 최초의 국립극장이라 할 수 있는 원각사, 이의 전신이었던 협률사에 초빙되어 서도소리와 재담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다년간의 발성 연습 속에 그의 나이 30세 정도에는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축음기 상회에서 주관하는 녹음작업에 참석하게 된다. 이때의 동행자들이 김홍도, 문영수, 심정순 등 8명이었다고 하는데, 김홍도나 문영수는 소리꾼으로 혼자 혹은 박춘재와 함께 소리를 주고받는 명창들이었지만, 심정순(1873~1937)은 누구인가?
그가 바로 박팔괘와 함께 충청제 가야금 산조의 1세대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팔괘 가야금 산조는 박상근-성금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반면, 심정순의 산조는 그의 조카인 심상건과 심정순의 아들인 심재덕이 이어 받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제자를 키우지 못하고 타계해서 맥이 끊겨 있는 상태이다.
심상건과 심재덕은 심정순의 가야금 산조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4촌 형제지간이다. 특히, 심재덕(1899~1967)은 심정순의 장남으로 심상건의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어깨 너머로 익혔다고 전해지는 산조의 명인이며 심상건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뜬 이후 작은 아버지인 심정순의 집에서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산조, 풍류, 가야금병창, 단가, 판소리, 시나위, 민요, 기악합주, 무용반주 등을 열심히 익혔다고 한다.
심정순의 아들딸들이 바로 심재덕, 심매향, 심재민, 심화영 등인데, 모두 예능에 뛰어난 집안으로 유명하며 특히 큰 아들 심재덕의 5남매 중 막내가 대중가수 심수봉이다.
잠시 심정순의 이야기를 하였다. 다시 박춘재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일본에 건너간 박춘재는 이들과 함께 총 100면의 레코드를 녹음하게 되는데, 이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서도 민요나 잡가류, 재담 등은 박춘재 명창이 녹음을 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동행했던 다른 사람들 7명이 분담하였다고 하니 그의 존재감이 단연 돋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