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박춘재 명창의 30세 이후 활동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다.
음악인 8명과 함께 도일하여 100면의 레코드 중, 절반을 박춘재가 녹음하였으며 그 내용은 <수심가>를 비롯한 서도소리와 경기긴잡가, 휘모리잡가, 그리고 <장대장타령>과 같은 재담이라는 이야기, 2차때에는 재담 이외에도 동행했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소리를 반주했다는 이야기, 32세 되던 1915년 이후에 나온 《무쌍신구잡가》에는 ‘조선제일류가객 박춘재군’이라는 설명과 사진이 있고, 그 이후 《증보신구시행잡가》나 《신구현행잡가》에는 ‘박춘재소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사람을 웃기는 재담이 주로 광무대와 단성사에서 열렸으며 <박춘재 놀음>이나 <박춘재와 그의 일행>으로 소개되었다는 이야기, 1942년에 조직된 조선음악협회 내에 조선가무단이 결성되었을 때, 이일선, 심상건, 박천복, 고준성 등과 줄타기의 명수 김봉엽, 신인 만담가 장소팔이 함께 하였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1944년, 61세 이후에는 신당동의 신부좌나 왕십리의 광무극장이 주 무대였는데, 이곳 왕십리는 서울소리 전문 재인들의 집합처가 되어 당시의 많은 명창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 해방이후 지방 순회공연을 떠나있던 도중 전쟁을 만나 경기도 광주에서 타계하였다는 이야기, 그 때가 1950년, 8월 21일, 그의 나이 67세였으며, 전쟁의 와중이어서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
||
▲ 박춘재 명인의 재담소리는 현재 백영춘 명인이 잇고 있다. |
그 어려운 시대에 노래와 재담으로 대중들의 고달픈 몸과 마음을 달래주고 웃음을 주었던 박춘재 명인의 생애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 의해 제대로 조명되어야 하고 공로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은신이 쓴 박춘재의 일대기 《조선일류가객-박춘재》라는 이름의 소설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한 명창을 밝게 널리 알리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의 발행을 축하하는 명인이나 학자들의 이야기를 이 난에 소개함으로써 박춘재 명인의 업적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먼저 경기민요 보유자인 이춘희 명창의 감회이다.
“재담은 흔히 재치있게 말하는 재미스런 말이라 하는데, 이러한 재담을 소리와 곁들여 일정한 서사적 내용으로 풀어나가는 것을 재담소리라 한다. 이 재담소리는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어 독특한 미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익살과 노래를 엮어 만든 우리 고유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재담소리의 최고봉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명창 박춘재 선생인데,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좋아하여 홍필원, 박춘경, 조기준 등에게 시조, 경기속요, 가사를 배우고 1900(광무4)년에는 궁내부 가무별감이 되었다.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을 만큼 뛰어난 소리꾼이었던 박춘재는 그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악계에 잘 알려지지 못했고 관련 자료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손자인 박진홍 선생에 의해 <박춘재명창 기념사업회>와 <기념관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아울러 이렇게 박춘재 평전까지 발행하게 된다니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큰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원로 희극인 송해 씨는 <박춘재 선생 일대기 소설출판에 감사하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재치와 풍자, 웃음과 재미로 엮어져 전해지는 재담은 소리와 함께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우리의 정신문화이다. 서양에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있고, 챨리 채프린과 슈발리에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박춘재 명인이 있어 자존과 긍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배고프고 힘들며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의 삶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창의력을 발휘한 박춘재 선생이 있어 지금의 한류문화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화시점에 서 있는 것이므로 먼저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전통문화의 경각심을 가질 때, 한류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전통재담이 만담과 코미디(희극)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 중심에 박춘재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박춘재 명인의 재담소리는 현재 백영춘 명인이 잇고 있다.
다음은 문화재 전문위원 배연형과 손태도의 글이다.
“박춘재의 모습은 유성기판과 하이칼라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구한말 서울소리를 대표하는 명창이었다. 신명이 넘치는 그의 재담에는 구한말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왕십리 장사치들의 외침, 할미당 무당의 굿판, 장님의 독경, 왈패들의 유쾌한 재담도 그의 솜씨를 빌리면 모두 소리가 되고 예술이 되었다. 노래가락, 창부타령, 긴잡가, 휘모리잡가, 산타령, 난봉가, 장대장타령, 개넋두리까지 그는 못하는 소리가 없고 드나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궁중과 시정을 넘나들고 경 서도를 메주 밟듯 누비고 다닌 자유인이었다.”
“그는 15세부터 가무별감이 되어 궁궐에서 고종황제 앞에서 소리를 하고 당대의 제일가객으로 가곡집 《정선조선가곡》을 남겼으며 잡가의 대명창으로 당대의 잡가를 그대로 실은 《증보신구시행잡가》를 남겼다. 당시의 대표적 레코드사인 일축에서 가장먼저, 가장 많은 음반을 남긴 명창이었고. 장대장타령, 맹인타령 등의 재담소리, 발탈 같은 가면극놀이로도 이름을 날린 명창이었다. 그는 진실로 대표적 경기명창이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인 명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위해 한 것은 없다. 이 소설이 우리의 그러한 무지와 무관심, 무감동, 무성의의 작은 방패막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박춘재의 손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묻혀있던 조부의 활약상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해 오다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떴다. 그는 “우리가 외래문화에는 관심이나 애정이 많은 편이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하며 만약 그 절반만이라도 전통문화에 배려했다면 박춘재 할아버지를 위해 작은 기념비라도 세웠을 것”이라며 장손으로 일말의 책임과 송구스럽고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한권의 책이 독자들에게 유익한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지속되기를 바라며 김은신 작가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외에도 많은 국악인들과 학자들이 박춘재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서 박춘재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세상에 훤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