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 맑음동두천 21.3℃
  • 맑음강릉 28.1℃
  • 맑음서울 22.4℃
  • 맑음대전 23.9℃
  • 맑음대구 26.7℃
  • 맑음울산 24.4℃
  • 맑음광주 24.7℃
  • 맑음부산 20.2℃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1.3℃
  • 맑음강화 18.6℃
  • 맑음보은 24.0℃
  • 맑음금산 23.3℃
  • 맑음강진군 21.8℃
  • 맑음경주시 25.5℃
  • 맑음거제 20.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광명 서독산 기슭 이순신 장군 무덤에 서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7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광명 케이티엑스(KTX) 역 뒷산인 서독산 기슭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무덤을 찾았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면 다들 ? 이순신 장군 무덤이 광명에 있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무덤은 당연히 현충사가 있는 아산에 있겠지요. 제가 찾은 무덤은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장군 무덤입니다.  

그러면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또 누구야?”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의공은 충무공 휘하 장수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바다에서 왜군과 싸운 장수이지요. 그러니까 한 부대에 동명이인이 있었던 겁니다. 전부터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에 이름이 같은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이순신 장군 무덤이 서독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번에 찾은 것입니다. 

무의공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7(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방답진 첨절제사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충무공 휘하에서 중위장, 전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한산도, 옥포, 부산포, 당포해전 등에서 활약을 하였습니다 

 

   
▲ 광명 케이티엑스(KTX) 역 뒷산인 서독산 기슭에 있는 이순신(李純信) 장군 무덤 전경

그런데 같은 부대에 이순신이 둘이 있으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저도 고교, 대학 동창에 저와 이름이 같은 안승국변호사가 있습니다. 비록 성은 틀리지만 둘 다 같이 공군 법무관으로 근무하였고, 판사 생활을 하면서는 의정부 법원에서 같이 근무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가끔 사람들이 저희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곤 하였지요.  

임진왜란 때 무의공의 활약은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도 나옵니다. 난중일기에서 충무공은 순신이 전투에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머리를 모아 공적을 자랑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충무공은 특별히 이를 장계로 알리기까지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 안타까움을 난중일기에 적었지요. 당시에는 승전의 실적을 적의 머리를 얼마나 베었느냐에 따라 결정하였습니다. 이러니 약삭빠른 이들은 전투에서 어떻게 적을 물리치느냐 보다는 적의 수급을 먼저 차지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심지어는 조선 백성들의 머리를 적의 머리로 바꿔치기 하여 보고하기도 하였구요. 아군이 이럴진대 우리를 도우러 온 명나라 군은 더했겠지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자기 나라로 퇴각할 때에 공에 눈이 먼 명나라 장수에게 자기들 퇴로를 열어주면 얼마의 머리를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 머리가 다 조선인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을 때,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낸 이도 무의공 이순신 장군이랍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의 전사 장면은 교과서에도 나오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무의공이 지휘봉을 받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은 보지 못했네요. 이순신이 죽었는데, 여전히 이순신이 전투를 지휘하면 학생들이 헷갈릴까봐 그랬나요? 어쨌든 이순신 장군의 지휘로 전투는 시작되었고, 또 이순신 장군의 지휘로 전투는 승리로 끝난 것이네요 

 

   
▲ 서독산 기슭의 이순신(李純信) 장군 무덤

전쟁이 끝난 뒤 무의공은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611(광해군 3) 59세의 나이로 먼저 간 이순신 장군을 따라 갑니다. 사후 이순신 장군은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1679(숙종 6)에는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무의공을 존경하여 해군의 장보고급 제7번 잠수함(SS-068)의 이름을 이순신함으로 붙였다고 하네요.  

물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딴 함정도 당연히 있지요. 4천톤급 구축함 KDX-11의 이름이 충무공 이순신함이랍니다. 지금도 이순신들은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있군요. 그런데 일반 국민은 물론 해군 장병들조차 이순신 잠수함을 충무공 이순신함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하하! 저승에서 무의공 이순신이 충무공 때문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개명 신청을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역사에는 또 다른 이순신이 나옵니다. 이번에 나오는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한자도 똑 같습니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충무공과 천양지차인 개망나니입니다. 중종 때 이조 종실(宗室)에 등림수 이순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등림수 이순신은 1518(중종 13) 형이 죽은 지 4일 만에 형의 첩을 꾀어 데리고 삽니다. 엄격한 유교 사회에 이런 비밀이 지켜지겠습니까?  

추문이 새어나가자, 등림수 이순신은 이를 덮으려고 이웃에 사는 가죽 장인(皮革匠)으로 하여금 형의 첩과 강제로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네요. ~~~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추문의 주인공을 가죽 장인으로 오판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요? 이거~ 지금 저승에는 3명의 이순신이 다 있을 텐데, 이번에는 충무공이 등림수 이순신이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고 개명 신청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무덤 앞에 서서 무의공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무덤 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무덤 좌우의 망주석 중 왼쪽 것은 부러져 있습니다. 무의공 후손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 관리를 잘 안 하는 모양이군요. 잠시 무의공에게 묵념을 올립니다.  

장군! 충무공만 기억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속상하였지요? 400여 년 전 두 이순신이 우리의 바다를 지켰기에,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번영된 조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 이제 되돌아가기 위하여 다시 숲속 오솔길로 들어서며, 마지막으로 무의공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장군!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