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박세화 선생의 본은 밀양이며 묵재 경상(默齋 景祥)의 8세손으로 고원군 남흥리(高原郡 南興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보다 크게 뛰어나 9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스승이 '소학의 일을 이루다 실천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므로 다시는 나아가 섬기지 않았다. 그만큼 성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찍이 그의 명성이 사방에 떨쳤는데 나이 18세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아래서 위정척사(衛正斥邪)할 것을 결의하고 신명(身命)을 다 바쳐 저지하고자 뜻을 세웠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어머니 우 씨의 병환이 심중하여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관혈(灌血)하여 회생시킨 적이 있었다.
10여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치상(致喪)을 정성껏 하여 병을 얻을 지경에 이르렀다. 후에 김직연(金直淵)이 의당(毅堂)이라고 당호를 지어 부르자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소식을 듣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자정(自靖)하였다.
그의 극빈함을 보고 한 부자가 재산을 반분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1885년 가인(家人)이 산삼을 얻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하여 박세화는 그것을 가난한 병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만년에 청풍 비억산에 들어가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살았다.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조정에 일이 많아 사양하였고, 1895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하자, 제자들과 대대적으로 추모하였다.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좌시(坐視)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박세화는 문생인 매당 윤응선(梅堂 尹應善)과 함께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한편 제천 의진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윤응선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그러나 문경에서의 거사 계획이 적에게 노출되었고 박세화 자신 노환으로 성사시키지 못한 채 문경 병참소(兵站所)에 체포되었다.
이때 윤웅선이 연좌되었다. 박세화는 윤응선에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라면서 거듭 떠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체포된 것이다. 한성 사령부에 8개월간 구금되었다. 그가 체포되자 문인 신현국(申鉉國)과 이수영(李秀榮)이 경찰서장에게 투서하여 스승의 거사가 대의(大義)에 합당한 것이었으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이 경찰서를 크게 파괴하였는데, 이일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박세화는 윤응선과 함께 남현(南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탄식하면서 "대명이 멸망한 후 천하에 임군이 없었고, 오로지 우리만이 동쪽에서 예의를 보존해 오면서 장래 좋은 일을 기대하여 왔다. 이제 나라가 망하게 되어 도(道)가 화(華, 小中華)와 더불어 망하게 될 터이니 장차 어찌 해야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식음을 전폐하여 23일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날이 8월 28일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