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55년부터 1956년 8월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 소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첫 해 3차에 걸친 조사결과로 윤치호가 유력하나 확정을 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표결결과 11:2로 만장일치가 되지못해 윤치호로 확정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일면 신중을 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문제를 학술적 결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려했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듬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는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오해가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안창호가 1907년 귀국하여 국가(國歌), 국기(國旗), 국화(國花) 같은 국가상징의 필요성을 강연을 통해 표하고 나름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귀국한 다음 달 의무균명학교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설하고 지어 제창할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西署萬里峴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였던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학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學校도 從今 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여 拜旗唱歌例를 舉行한다더라.”<國旗禮拜,『大韓每日申報』1907년 3월 20일자>
이는 안창호가 미국의 경험을 제시하며 한국에서도 이를 따를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 존재는 1908년 3월 『태극학보(太極學報)』 제18호에 발표한 <애국가(愛國歌)>로 확인 된다. 필명을 ‘애국생(愛國生)’으로 하여 망국의 책임이 누구 탓도 아닌 너와 나의 탓이므로, 주인으로서 애국정신과 하나 된 단체 힘으로 나라를 되찾아 중흥영웅이 되자고 하는 내용이다.
<애국가>
1.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 사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 수묘전토도 내 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을 대답 못하고 / 공연한 구타도 거져 밧노라
3. 남산초목도 눈이 있으면 / 비창한 눈물이 가득하겠고
동해에 별도 마음이 있으면 / 우리와 같이 슬퍼하리라
4.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 죽기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남이 다치면 / 저를 반드시 쏘고 죽는다
5. 눈을 들어 살펴보니 / 삼천리 강산에 사무친 것은
우리 부모의 한숨 소리요 / 우리 동포의 눈물이로세
6. 금수강산이 빛을 잃고 / 광명한 일월이 아득하도다
이것이 뉘 죄냐 생각하여라 / 네 죄와 내 죄 까닭이로다
7. 사랑하는 우리 청년아 / 자든지 깨든지 우리 마음에
나태한 악습과 의뢰 사상을 / 모두다 한 칼로 끊어버리고
8. 사랑하는 우리 동포야 / 죽든지 살든지 우리 마음에
와신상담을 잊지 말아서 / 우리의 국가를 회복합세다
9. 애국정신과 단체 힘으로 / 육단혈류를 무릅쓰면서
원수가 비록 산과 같하되 / 우리 앞을 막지 못하리
10. 독립기 달고 자유종 칠 때에 / 부모의 한숨은 웃음이 되고
동포의 눈물은 기쁨 되리니 / 중흥영웅이 우리 아닌가
(후렴) 열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독립만세 우리 소리에 / 바다가 끓고 산이 동켔네
결국 이 <애국가> 작사 때문에 안창호는 1907년 윤치호의 작사로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확산된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거명이 된 것이다. 국내에서 그 작사자를 드러내 부를 수 없었던 시대상이 낳은 오해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