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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조말생 – 능력이나 청렴이냐

문재인 정부 내각 1기 출범을 보면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8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726일 문재인 정부 내각 1기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지요? 이번에도 새 각료 인선을 위한 청문회에서 많은 후보자들이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네요.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않을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청문회 때마다 자신의 개인 이력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부담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후보로 제청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도덕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고, 심지어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보다는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가 우선이 되었기에, 청문회 때마다 이런 사태를 보게 되는 가 봅니다. 더구나 교육에 있어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보다는 1등주의 교육을 위주로 한 것이 그런 의식을 더욱 조장한 것이구요.

 

과거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유학을 국시로 하여 검소한 멋을 추구한 조선, 그래서 청빈(淸貧)한 선비를 존경한 조선에서는 더욱 이러한 흠결이 드러난 관리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물론 조선도 후기로 넘어가면서 이런 유학의 이념이 무색할 정도로 탐관오리가 많아졌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 특히 세종대왕 시절에는 왕과 신하들이 사심을 버리고 일심으로 조선 건국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런 관리는 임관되기도 쉽지 않고, 중간에 흠결이 발견되면 버티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세종 때 정승의 반열에 올랐던 조말생(1370~1447)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말생은 뇌물을 받고 벼슬을 주거나 승진을 시켜주는 일이 많아, 이를 고발하는 상소문이 이어졌습니다.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노비 48, 4(100만 평방미터), 은병 수천 근 등으로 이를 합치면 780관에 달하는 액수라고 합니다.

 

당연히 조말생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고,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세종은 조말생을 단지 귀양 보내는 것에 그칩니다. 그것도 귀양 기간은 고작 2년에 그치고, 2년 후에는 조말생을 다시 복귀시켜 동지중추원사, 함길도 관찰사 등을 맡겼습니다.

 

우리가 대왕으로 칭송하는 세종이 왜 이런 처사를 했을까요? 그것은 조말생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아직 조선 건국 초기라 명나라와 외교문제가 중요했고, 또한 동북방에서는 여진족이 국경을 시끄럽게 할 때입니다. 이 때 명나라와의 외교와 여진족에 대한 국방 문제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조말생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든 조선을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던 세종으로서는 이러한 조말생의 능력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조말생과 같은 부패관리도 귀양 보내었다가 다시 2년 만에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말생은 세종이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면 조용히 자숙하며 열심히 국가에 봉사만 할 것이지, 세종의 신임을 기화로 자신에게 내려진 유죄 판정을 번복시키려고 하였답니다. 하지만 세종이 그러한 조말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조말생의 무덤이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감이 잘 오지 않겠지요? 강북 강변도로가 워커힐을 지나고 구리시 왕숙천을 건너면 강변의 조그만 야산을 만나는데, 여기서 강변도로는 야산을 왼쪽으로 비껴가며 강변도로의 역할을 끝냅니다. 이곳 야산 일대가 남양주시 수석동인데, 야산의 꼭대기 부근에는 조말생이 소속된 양주 조씨 종중의 선산이 있고, 조말생의 무덤은 강변에 접한 야산 둔덕 위에서 한강과 덕소, 미사리 일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말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전에 호평 소재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런데 야산 입구 마을의 안내판에는 삼국시대 토성인 수석리 토성밖에 안 나와서, 일단 이곳부터 찾기로 했습니다. 근처에 조말생 무덤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여기를 찾으면 조말생 무덤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내판을 보고 올라간 야산의 중턱에서 길이 끊겨졌습니다. 남양주시에서 길을 만들다 만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생각지도 않던 양주 조씨 선산을 보게 되고, 그 선산을 넘어가서야 겨우 수석리 토성과 조말생 신도비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수석리 토성을 먼저 보려고 하였지요. 그래서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올라가니, 희미한 길은 거미가 허공에 겹겹이 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은 거미들의 생존 줄을 무참히 끊으면서 전진하였는데, 결국 계속 나타나는 거미줄에 항복하고 돌아섰습니다. 가보았자 토성의 흔적은 별로 안 남고, 안내판 하나 달랑 있는 정도일 것이라, 그 정도에서 포기한 것이지요. ~~~ 남양주시가 건성으로 안내 표지판을 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