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 가사 3편이 《찬미가》에 모두 수록돼 있고, 문맥이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고 보면 애국가 작사자의 판정은 명약관화해진다.”(독서신문, 249호, 1975. 10. 19)
이 주장은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로서 누구보다도 신빙성이 있어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는 분은 윤치호씨를 제치고는 찾기 힘들다.”라고 한 국악학자 장사훈(張師勛)의 「여명의 동서음악」(1982)의 주장이나 “교회 개척운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가던 무렵에 윤치호 선생은 우리의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한 유동식의 「정동교회백년사」(1983)의 주장에 앞선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찬미기의 내용
윤치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평생의 일기의 많은 부분은 가계부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모든 저술도 매우 실용적으로 편집, 발행되었다. 그것은 독자에게 염가로 제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찬미가》의 경우도 이런 이유에서 서문과 목차를 생략하였다.
내용 역시도 자신의 번역으로 학생들에 적합한 찬송가 12편과 애국가류 3편을 수록한 것이다. 1장(KOREA), 10장(무궁화가), 14장(애국가)이 창작 애국가류이고, 12편은 윤치호의 번역 찬송가이다. 6장 <아침 날이 돋으니 어둠이 다 가네>는 기존 찬송가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고, 나머지는 현 《합동찬송가》에 수록 된 것이다. 괄호의 장 표기는 오늘의 《합동찬송가》 장 수다. 각 장의 곡명은 원곡을 표기하고 있으나 합동찬송가에서의 것은 다음과 같다.
1장: 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KOREA)
2장: 사랑하난 예수 품속에 들이소사(441장)
3장: 성재 성재 성재 전능하신 주여(9장)
4장: 서라 십자가 군사 예수 위해 서게(390장)
5장: 베들레헴 새벽별은 창공에 찬란하고(126장)
6장: 아침 날이 돋으니 어둠이 가네
7장: 일하세 밤 되나니 아참에 일하세(37장),
8장: 내 믿고 나타난 십자가 속죄한 구세주여(435장)
9장: 그리스도 군사 앞서 나가세(389장)
10장: 승자 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무궁화가)
11장: 귀하다 우리 맘 서로 맺는 사랑(525장)
12장: 주를 만난 자의 견고한 터가(434장)
13장: 해는 지고 밤은 가까오니(531장)
14장: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애국가)
15장: 끄릴난 어름 산과 인도 산호섬과(273장)
애국가류 3편의 곡명과 곡조는 다음가 같다. 이 세 작품은 창작으로 기존 찬송가집이나 이후 합동찬송가집에 수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표기가 원래의 곡명이 된다.
1장. KOREA, TUNE AMERICA 664, 6664, 뎨一
10장. Patriotic Hymn, No[1], TUNE AULD LANG SIGN, 뎨10
14장.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十四
윤치호는 ‘찬송가’(讚頌歌)ㆍ‘찬양가’(讚揚歌) 또는 ‘복음가’(福音歌)가 아닌 ‘찬미가’라는 용어를 썼다. 1888년 중국 유학시절 일기에서 “오전 성경공부하다. 오후에 산보하고 종자진 집에 가서 찬미가를 읽고 소일하고 오다. 7시 반에 해인복음회에 가서 설교 듣고 오다.”(윤치호일기, 1888. 9. 16)라고 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영서원>의 교과목에서도 ‘찬미가’로 칭하였다.
《찬미가》의 성격
《찬미가》는 애국가류의 수록과 출판 시기를 감안하면 오래 꿈 꿔온 기독교적 교육국구 사업인 <한영서원> 개교와 이를 통한 ‘교육과 사회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책이다. “한국인에 의한 토착 신앙적 고백 찬송가가 부족하던 시기에 쇠하여 가는 국운 앞에서 민족신앙을 응축 한 책이다."(「한국찬송가100년」, 136쪽) 라고 평가한 이유이다.
결국 《찬미가》는 윤치호 생애의 교육구국사상의 상징적이 출판물이다. 사실 이는 당시 감리교단의 상황으로 보아도 그런데, 이미 감리교계에서는 1902년 《증보찬미가》를 통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윤치호의 것을 공인을 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을 모를리 없는 윤치호로서는 목적이 분명했다. 바로 한영서원 교육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1장 첫 머리에 ‘KOREA’(국가)를 배치한 것이고, 이어서 애국가류 두 편을 작사 순으로 배치, 수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상의 3편에 대한 곡명을 각각 달리 표기해왔다. 최초의 석사논문인 김영숙의 《윤치호 찬미가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초창기 한국 교인들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잘 반영된 찬송가”라며 3편 모두를 ‘애국송’(愛國頌)으로 통칭하고 각각 1장 ‘황제송’(皇帝頌) 10장 ‘애국송’(愛國頌) 14장 ‘애국가’(愛國歌)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노동은 교수는 《애국가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역사비평, 1994, 25호)에서는 아예 3편은 곡명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위의 두 유형은 서지학적으로는 모두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즉, 1차적으로는 《찬미가》 표기 그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찬미가1장’, ‘찬미가10장’, ‘찬미가14장’이 된다. 윤치호가 굳이 영문으로 표현 한 이유가 세 편을 애국적인 노래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07년은 통감부가 교고서 통제를 본격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최초 곡명은 ‘Patriotic Hymn 데14’이고 윤치호의 의도대로 번역하면 ‘찬미가 14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