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회자의 적절한 무대진행 솜씨도 한 몫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부 다른 대회를 보면 사회자가 말이 많고, 비전문인을 무대에 내세워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예가 있었지만 이번 벽파 경연에서는 품격있고 재미있는 진행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명창부의 대상에는 최정애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 고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민요를 비롯한 전통음악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음악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오늘의 어른들, 국악인들, 교육지도자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 대회가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대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욱 발전해서 한국 제일의 경서도 민요 경창대회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지적해 두어야 할 문제도 없지 않았다.
첫째, 벽파 선생의 직접 제자들을 비롯하여 본 경연대회를 주최 주관하는 사람들은 대회당일 개회선언 전에 벽파선생의 동상 앞에 묵념이나 헌화를 마친 후, 개회선언을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다음 간단한 개회식을 통해 경창대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벽파 선생이 어떤 분이었는가 하는 점을 알리는 의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대회사나 영상 화면을 통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벽파 선생의 직계 제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악인들, 특히 대학의 전공자들조차 벽파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배 선생의 아호을 걸고 하는 경창대회에서 적어도 <벽파>가 누구이고, 무엇을 한 분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대회의 경우, 당일 아침까지 출전자들의 접수 상황이 확인되지 않아서 경연 시작시간이 늦어졌는데 그 까닭으로 이번 대회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었지만 아쉽기만 하다. 다소 어렵다고 해도 1~2일 전에는 접수를 마감하고 출전자 명단을 작성하여 여유 있게 진행할 것을 권한다.
둘째는 지정곡을 부여하는 문제이다. 내년이나 후년, 또는 앞으로 대회의 권위를 더더욱 높여나가기 위해서 명창부의 예선이나 본선 경연에서는 주최측이 지정한 3~4곡 중에서 당일 추첨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문제도 검토되어야 하고, 이와 함께 좌창과 입창의 부문은 별도로 경연을 하고, 최종 결선에서 대상을 선정하는 방법은 어떠한지?, 그리고 대상 선정시의 지정곡은 모두가 민요로 통일하는 문제 등도 검토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덧붙인다면 경연이 끝나고 시상식 전에 갖는 축하 무대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문화재 전승자들이 되었거나 또는 유명 소리꾼들이 된 제자들이 대거 참여해서 선생을 기리는 보다 더 큰 축제의 잔치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와함께 시상식에도 국악계나 문화예술계 인사들, 특히 선생의 고향인 성동구청이나 의회, 문화원 등 관련 인사들이 참여해서 선생의 유업을 확인하고 받들도록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노력할 일이다. 벽파 대상에 참가하는 자체가 영광이고, 기억에 남는 축제장으로 이 대회가 자리를 잡아가기를 기대한다.
시상식에서 벽파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이상만 위원장의 인사말은 벽파가 얼마나 경기민요의 보급과 교육을 위해 몸부림을 쳐 온 분인가 하는 점을 잘 알게 해 주었다. 많은 참가자와 청중들에게 감명을 주었기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지역을 초월한 경서도 소리의 전파는 유성기라는 매체수단과 함께 그 뒤에 라디오방송이 생기면서 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통신수단을 잘 활용한 분이 바로 경기소리의 지도자 벽파 이창배 선생이었습니다.
벽파의 시대는 많은 국악인들이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선생은 공업학교를 나온 당시의 엘리트 계층으로 인문학에도 깊은 지식을 가졌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소리를 하니까, 당시로서는 별난 사람이라고 보았지요. 그래도 신명을 바쳐 국악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특히, 과학적인 머리로 당시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던 방송을 통해서 경기소리를 보급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그는 이어서 당시에 획기적으로 제작한 음반 이야기와 경서도 민요가 남도소리보다도 외면을 당하던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1958년 당시, 공보실(지금의 문광부)에서 우리나라에 전승되고 있는 국악을 30분짜리 테잎 138개 분을 녹음하여 <국악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는데, 이창배 선생이 아니었다면 경기 산타령은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남도(南道) 음악인들의 기세가 당당해서 방송의 대부분을 그분들이 점유했고, 경서도 소리는 찬밥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KBS방송의 PD를 하고 있으면서 이혜구 선생을 도와 <국악학회>의 심부름도 하면서 방송관계의 일을 벽파 선생과 자주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선생은 방송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생의 말씨, 성품, 제자 사랑, 등을 소상하게 전해 주었다.
“선생은 잔잔한 음성으로 서울 말씨를 정확하게 구사하였으며 차분하고 겸손한 인품을 갖추었던 분입니다. 온화한 성품으로 국악인들을 많이 돕고 또한 후배들이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경기민요를 하던 분들은 당시에 그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그 분과의 교분을 가졌던 것이 내 생애의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벽파선생을 기리는 말씀에 장내는 숙연해 졌다. 어느 참가자는 이 대회가 갖는 의미나 권위를 이제 더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감회를 털어 놓았다.
선생은 말년에 목이 가라앉아 소리를 내지 못 할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참아내며 소리를 하였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경기소리의 사설집이나 가창대계와 같은 책을 정리하는 등, 경기민요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경기민요 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벽파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경서도 소리와 관련한 추모사업 등이 선생의 제자들과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경서도 민요경창대회는 모든 국악인의 염원을 담은 축제로 그 권위나 규모가 우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