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봉제 백인영류의 짧은 산조를 들으면서 백인영은 참으로 음악적 재기(才氣)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와 여성국극단에 입단해서 명인 명창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음악인생을 배웠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쑥대머리>대목을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부르며 가야금 병창곡을 만들었는데, 노래와 판소리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가야금 가락이 이채로웠다는 이야기 등도 하였다.
이번 주에도 백인영 5주기 추모음악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일 무대에 올려진 세 번째 곡목은 <백인영류 아쟁산조>를 가야금과 병주로 연주하는 순서였다. 아쟁에는 김영길, 가야금에는 백기숙과 이민영이 서은기의 장단에 맞추어 연주하였는데, 서울 경기지방의 경드름 가락이 첨가되어 있어서 선율의 진행이 매우 발랄하고 유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아쟁산조는 백인영 이외에는 연주하는 사람이 없어 단절의 위기를 맞았으나 【국립국악원】의 김영길이 이를 복원하였고, 이날은 더더욱 공력이 발휘되어 마치 백인영이 연주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어진 네 번째 순서는 백인영과 동향으로 오누이처럼 가깝게 지내던 신영희 명창이 나와 판소리 심청가 중 <황성올라가는 대목>을 불러주었고, 마지막으로 다 함께 소리한 <흥타령>과 <육자배기> 소리는 가야금 10여명의 반주진과 아쟁, 대금, 장단이 함께 수성가락으로 어울렸다.
남도 민요가 시작되기 전, 나는 진행자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가서 백인영과의 살아생전 회고의 시간을 잠시 갖기도 했다. 나와 백인영은 전공분야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학교의 선후배 관계도 아니면서,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기 어려운 관계였으나, 그의 연주를 듣고 난 뒤 더욱 그의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인간미에 빠져들어 점차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지금과 달리, 40여 년 전, 1980년대만 해도 국악이나 국악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나 인식은 현재와는 달리 냉소적이었고 응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젊은이들의 고민이며 숙제였다. 국악전문인을 양성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국악과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후원자나 애호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나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학교 강단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이나 강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육방송에서 백인영과 매주 만나 방송을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고, 그런 인연으로 내가 몸담고 있던 대학의 교양수업에 백인영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하여 장르를 넘어선 다양한 음악들을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삼청동 공무원 교육원이나, 경기도 수원의 교육원, 서울 필운동의 교육연수원, 방배동 연수원, 기업체의 교양강좌, YMCA 시민을 위한 강좌, 방송, 심지어 중국이나 미국의 대학 등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어 전통음악도 재미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악의 인식 바꾸기 운동을 함께 전개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이다.
9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데 강동구의 어느 중학교 교장 친구에게 백인영을 소개하고 가야금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활동반의 조직을 권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이 그것이 실현되고 그때 가야금을 배운 학생들이 자라나서 2000년도에는 <예랑실내악단>을 창단하게 되었으며, 현재 그 학생들이 백인영의 음악을 이어가는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5주기 추모음악회도 준비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음악적인 면은 흠 잡을 것이 없으나, 생활 속에서 만난 백인영은 성미가 다소 급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특히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승산 없는 싸움에도 가끔은 목숨을 거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술 담배를 끊고 건강을 회복하던 중이었다. 점차 호전되어 가고 있다는 결과를 접하고는 다시 무리를 할 정도였으니 참고 기다림이 부족했던 그를 원망한들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 따듯한 사람이었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자기주장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전단에 나는 <백인영 명인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백인영 선생! 오랜만이오!
길 갈라섰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5주기 추모음악회 소식을 듣고서야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오. 그곳에서도 가야금, 아쟁으로 많은 영혼들 위로하느라 바쁘게 지내시겠지? 조금 더 여기에서 제자들 키우고, 여러 사람 즐겁게 해 주고 갈 일이지, 무엇이 급해 그토록 서둘러 떠났단 말이오. 당신 떠난 뒤로 제자들이 얼마나 외로워했고, 힘들어 했는지,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부대끼며 음악인으로 얼마나 성숙해 가고 있는지, 오늘 제자들이 준비한 음악 들어보고 생전에 다그치듯 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칭찬과 격려의 말을 많이 해 주시구려. 백 명인!
나는 가끔 90년대 초, 당신과 함께 매주 토요일 교육방송의 국악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를 떠 올리며 혼자 웃고는 하오. 당신은 열심히 출연자들을 위해 가야금이나 아쟁으로 즉석 반주를 해 주었지, 혹 출연자들이 음을 놓치거나 중간에 청(淸)을 바꾸기라도 하면, 어이없어 하는 그 표정이 너무도 재미있었다오. 그러나 방송 중에 웃을 수도 없고,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조율을 해 가며 반주해 주던 당신의 순발력을 보고는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은 창자(唱者)가 중간에 실수하게 되면, 손을 놓고 실수를 지켜볼 뿐이었는데, 당신처럼 반주를 하면서 조율을 동시에 해결하는 연주자는 본 기억이 없다오.
옛날, 어떤 명인이 가야금을 타다가 줄 하나가 끊어지니 태연히 계속해 나갔고, 또 한 줄이 더 끊어지니까 그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아랫줄이나 윗줄을 활용해 끝을 맺고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다오. 그러나 당신처럼 조율과 반주를 동시에 해결하는 연주자는 본 적이 없기에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쟁이라 생각했다오. “백인영 앞에서 함부로 가야금 타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 뒤집어 생각해도 참으로 무서운 소리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오.
백 선생!,
살아생전, 대학강단이나 관공서 연수원 등, 공공장소에서 국악특강을 할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와서 도와 준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웠다는 진심어린 마음을 전하오. 당신 떠나간 이후, 당신처럼 살아 움직이는 음악은 만나기 어렵고, 악보 속에 앉아있는 음들을 읽어대는 틀에 박힌 가락들만 난무할 뿐, 자유자재로 가야금을 다루는 쟁이를 만나지 못해 음악을 듣는 재미가 많이 감소되었다오. 그래서 당신이 더더욱 생각나는 것인지 모르겠소.
백인영씨,
이번 음악회에는 당신의 제자들 20여명과 신영희, 김청만, 등 생전 절친들이 무대에 선다오. 당신이 남기고 간 가락들을 열심히 지켜나가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보면서 걱정은 잊고, 어린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지켜보시오. 그리고 칭찬과 격려를 잊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