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기호 교수]
올해는 우리 배달겨레의 으뜸 성군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600돌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맞아 세종대왕의 사상과 철학을 톺아보고 이 즈음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새롭게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자하는 “세종대왕 즉위600돌 문화제 국민위원회” 최기호 공동대표의 연재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
세종대왕은 1397년 5원 15일(음4.10) 정양군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인왕산 기슭 경복궁 영추문 밖 한양 준수방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다. 세종대왕은 1418년 9월 9일(음 8.10)에 22살의 나이에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여, 1450년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금년 2018년은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6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다.
세종대왕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그밖에 과학기술, 음악, 국방, 외교, 농경, 천문, 문화, 한의학, 사회복지 등 각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성군이시다.
세종대왕의 사상과 철학 그 줄거리
첫째, 세종대왕은 자주사상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았다.
“나랏말이 중국과 다르다(異)”고 하여 우리 겨레의 자랑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였다,
“중국 농사법과 조선 농사법이 다르다.”고 하여 우리 풍토에 맞는 농업서 《농사직설》을 펴냈다.
“중국 의학과 조선 의학이 다르다.”고 하여 《향약집성방》을 펴내 한의학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중국 하늘의 별과 조선 하늘의 별이 다르다.”고하여 조선 고유의 역법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펴냈고, 조선의 자주적인 천문대 간의대를 만들어 세계적인 천문학을 이루었다. 또 해시계, 물시계, 수표, 측우기 등을 발명하였다.
세종대왕은 박연을 악학별좌로 기용하여 중국과 다른 우리의 율관(律管)을 새로 제정하였으며, 여민락(與民樂) 같은 우리 음악을 창작하였다.
둘째, 세종대왕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여, 사람 중심의 애민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1423년(세종5) 7월 3일.
세종대왕은 신분의 귀천이나 노약자, 고아, 장애인, 임산부 등 사회의 약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복지사회를 꿈꾸고 실천한 것이 《세종실록>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노비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라.” 《세종실록》 1434년(세종 16) 4월 26일. 임산부인 여종에게는 이미 100일간의 유급 휴가를 주었다.
“지역별로 관비를 선발해 제생원에서 가르친 후, 부녀자를 치료하게 하라.”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12월 4일
“관현악기를 다루는 시각장애인 중 천민인 자도 재주를 시험하여 채용하라.” 《세종실록》 1434년(세종 16) 11월 24일.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효도에 대한 풍속이 두터워진다.” 《세종실록》 1435년(세종 17) 6월 21일.
“아이들에게는 겨울철에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제생원에서 항상 관찰하게 하라.” 《세종실록》 1435년(세종 17) 6월 22일.
”나라의 바탕을 견고하게 한다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하는 풍속이 일어나서,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 윤7월 25일
셋째, 세종대왕은 경청과 소통의 철학으로 나라를 통치하였다.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경청(傾聽)은 매우 중요한 능력이고 덕목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동기를 이해하는 상호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 제일 먼저 한 말이 “토론 해 보자.”였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나라에 도움이 되는 말을 무엇이든지 말해달라고 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세종대왕은 즉위한 뒤에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하니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여 신하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래서 최만리, 허조, 고약해 같은 직간(直諫)을 잘 하는 쓴 소리도 귀담아 듣고, 포용하였으며, 정책을 결정하는데 활용하였다.
넷째, 세종대왕은 능력을 중시하는 인재 등용 철학으로 신하를 뽑아 썼다.
세종대왕은 대왕이기 이전에 뛰어난 과학자였고, 공평무사한 판관이었으며 인품이 넘치는 선비였다. 세종대왕은 이처럼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부리는 용인술이 뛰어났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중시하는 폭넓은 철학이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유난히 ‘황희 의견을 따랐다’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사실 황희는 거액 부정사건 등 여러 가지 흠결이 있었다. 그러나 황희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보는 대신이었다. 세종대왕은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켜 등용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황희를 24년간 정승자리에 있게 하였다.
노비 출신인 장영실이나. 천문학자 이순지, 이천, 화학자, 최산해, 음악가 박연 등 신하들도 모두 능력을 중시하여 등용한 인물들이다.
다섯째 세종대왕은 창의적인 실험정신의 과학자였다.
세종대왕은 남달리 창의적인 실험정신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유난히 ‘실험하다’라는 뜻의 ‘시(試)’가 많이 나온다. 과학자와 기술자를 파격적으로 선발하고 우대하여 큰 과학 업적을 이룬 것도 세종대왕의 창의적인 실험정신이 바탕이었다.
세종대왕은 그 당시 세계적인 천문학자였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하여 측우기와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을 만들게 하였다. 지금도 하늘에는 ‘세종별’이 돌고 있다.
15세기,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의 강국이었다. 1983년 이토준타로(伊東 俊太郞) 등이 펴낸 《과학사 기술사 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을 보면 그 당시 명나라의 과학기술은 5건이었고, 일본은 한 건도 없었다. 동아시아 이외 세계는 28건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조선은 무려 29건의 최고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천재였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노력하는 천재라는 것이다. 세종 재임기간 동안 경연은 놀랍게도 모두 1,835회 열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경연을 통하여 신하들과 소통하고 국정철학을 공유하였다.
세종대왕의 철학과 정신을 계승하자
세종대왕은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겨레 문화를 이룩한 성군이시다. 이 시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고 부흥을 이룬 때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길러졌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겨레의 큰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위업과 유덕을 기리고,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종대왕의 철학과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의 국가적 난국을 극복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최기호 (세종대왕 즉위600돌 문화제 국민위원회 공동대표)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동경외국어대 대학원 몽골학과를 수료했다.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총장, 교육부 국어교과서 편찬심의위원, 한글학회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무이사, 외솔회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세종대왕 나신곳성역화 국민위원회” 상임대표와 “세종대왕 즉위600돌 문화제 국민위원회” 공동대표, 사단법인 한국몽골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몽골 오치르바트 초대 대통령에게서 한몽 친선훈장(2000)을 받았고, 몽골 엘백도르지 대통령으로부터 북극성 최고 훈장(2011)을 받았으며, (재)외솔회가 주는 외솔상(2014)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