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기념하여 2019년 2월 25일(월)부터 테마전 ‘독립운동의 힘, 한글’을 연다. 이번 전시는 한글의 다양한 모습과 새로운 자료를 효율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상설전시실 내에 새롭게 마련된 테마전시 공간에서 여는 첫 번째 전시다.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돌 기념 테마전 <독립운동의 힘, 한글>
1894년 한글이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되었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 겨레는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일제의 압박과 탄압에도 국어학자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말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전시는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 여기는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선조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조명한다.
“한글이 목숨”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대표적인 국어학자 최현배(崔賢培, 1894~1970)는 1930년대 한 음식점 방명록인 《금서집(錦書集, 외솔기념관 소장)》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글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명록의 문구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지키려 했던 그의 간절한 마음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을 지낸 이극로(李克魯, 1893~1978)는 한글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하여 ‘물불’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 《고투사십년(苦鬪四十年)》에는 이러한 그의 고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비롯한 일제 강점기 국어학자들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이라는 이름 첫 기록, 《한글모죽보기》 그리고 한글날
1446년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언제부터 ‘한글’로 불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한글모죽보기》에 기록된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꿨다는 설명에 처음 등장한다. 《한글모죽보기》(《한글모죽보기》에서 ‘모’는 모임, ‘죽보기’는 여러 내용을 한 번에 죽 훑어볼 수 있게 만든 책이라는 의미)는 국어학자 이규영(李圭榮, 1890~1920)이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언문회는 1911년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에 ‘한글모’로 다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우리 말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가 주도하여 처음 ‘가갸날’을 제정하고 1928년에는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글장님”을 없애자
1920년대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민중을 자각시키려는 목적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한글보급운동인 ‘브나로드 운동(‘브나로드’는‘민중 속으로’라는 의미의 러시아어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펼친 계몽운동을 브나로드 운동으로 지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을 진행하고, 조선어학회도 한글 보급을 위해 강습회를 주최하고 언론사와 함께 문맹퇴치 운동을 펼쳤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은 이윤재(李允宰, 1888~1943)는 한글 교재인 《한글공부》를 펴내 동아일보와 함께 학생계몽대를 조직하여 한글을 보급하였다. 당시에 문맹을 “글장님”으로 지칭하였으며, 글장님을 없애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동아일보> 따위에 실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글 강습회가 성황을 이루자 1933년 조선총독부는 한글 강습회를 중단시켰으며 1935년부터는 전면 금지시켰다.
맞춤법 통일, 민족의식의 통일
한글이 근대적인 문자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통일된 표기 체계가 필요하였다. 1894년 한글이 공식 글자가 된 뒤 표기법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학부(學部) 안에 한글 연구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어 주시경(周時經, 1876~1914) 같은 연구위원들이 한글표기법통일안인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표기법 통일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맞춤법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시행에 한계가 있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우리 손으로 맞춤법을 통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3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민족진영, 사회주의계열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에서 지지를 선언했다. 맞춤법의 통일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향한 민족의 단결을 이루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상설전시실 개선과 국어 교과서의 변천을 보여주는 전시
한편 상설전시실 3부의 전시환경을 개선하여 전시품이 돋보이도록 하였으며, 전시 내용도 강화하였다. 전시실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에 펴낸 다양한 교과서를 비롯하여, 광복 이후부터 7차 교육과정까지 펴낸 국어 교과서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88년의 국어 교과서에서 ‘나’와 ‘어머니’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교과서를 통해 세대별로 같거나 다른 추억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앞으로 한글의 다양한 모습과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는 주제전시를 지속적으로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