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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만세운동 100돌에 만나는 여성독립운동가 100인

부산이 낳은 대륙의 불꽃 '박차정 의사' 생가에 가다

생가 입구 넓혀 출입 쉽게 해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부산의 조숙한 문학소녀

경술국치 치욕의 날 자결한 아버지 뒤를 이어

타오르던 항일 투지 끝내 의열단 투신했었지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사랑하는

조선의 피 끓는 혁명가와 맺은 언약

신방에 타오르는 촛불 우국의 횃불 삼아

대륙을 휘저으며 일제에 대적하던 여장부

 

곤륜산 피 튀는 전투에서 마감한 서른네 해 삶

왜적의 총칼에 날개 꺾였으나

나라사랑 마음 생사 따라 변하지 않아

 

조국의 빛 찾던 날 피 묻은 속적삼 가슴에 품고

고향 땅 돌아온 남편 슬픔 삭일 때

긴 가뭄 끝 밀양 감전동 하늘에 때맞춰 내리던 단비

대지에 피처럼 스며들던 불굴의 투지여라.

                                          - 이윤옥 시 ’부산이 낳은 대륙의 불꽃 박차정’ 가운데-

 

햇살 따스한 어제(4일) 오후 2시, 칠산동(새주소: 동래구 명륜로 98번길)에 자리한 박차정 의사 생가를 오랜만에 다시 찾아 툇마루에 앉았다.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다. 마침 그 자리에는 문화재해설사 주용돈 선생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올해 나이 80살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주용돈 선생은 박차정 의사 일가의 독립운동사를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들려준다.

 

 

 

“박차정 의사의 아버지는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자결한 분입니다. 또한 오라버니 박문희(2018. 애족장)도 고향에 있을 때는 동래청년연맹 집행위원(1925)과 신간회 상무위원(1929) 등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그 뒤 1932년 8월 중국 남경에 있던 김원봉으로부터 남경군관학교 훈련생 모집을 요청받고 국내로 들어와 경상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훈련생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박차정 의사도 결국 오라버니가 중국으로 불러서 그곳에서 활동하시게 됩니다.” 주용돈 선생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한 집안에서 자랐으니 의당, 독립정신이 몸에 배었을 것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3학년 때 만세운동에 뛰어들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운동권 학생인 셈이지요. 전시장 안을 보시면 자세한 활동사진과 기록들이 있습니다.”

 

‘전시장’이라고 했지만 작은 방 두 개가 전부다. 이곳이 박차정(1995. 독립장) 의사 생가였던 만큼 큰 공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유관순 열사처럼 독립장(2019년 대한민국장을 새로 추서받음)을 받은 의사(義士)를 기리는 공간으로는 협소하고 어설퍼 보인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은 주차는커녕 사람하나 들어가기도 비좁다. 원래 마을 안에 있던 생가이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들어가는 입구에 불필요한(?) 벽돌담만이라도 헐어냈으면 싶은 생각이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 생가가 따로 있는데다가 기념관이 별도로 있지만 박차정 의사의 경우는 생가를 겸한 전시 공간이라 더욱 초라해 보인다.

 

“박차정 의사 동상을 보십시오. 박 의사는 총을 들고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활약한 분들은 의사(義士)십니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처럼 말이지요. 박차정 의사는 여자지만 당당한 의사입니다. 유관순 같이 무기를 들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열사(烈士)지요. 저는 알기 쉽게 여기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주말이면 많은 학생들이 찾아옵니다.”

 

주용돈 해설사의 말이다. 그는 올해 1년 동안 박차정 의사 생가에서 해설사로 일한다고 했다. 15살이던 박차정 의사는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였고 이후 근우회,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3월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7월 서울 수운회관에서 열린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1929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ㆍ상무위원ㆍ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박차정 의사는 그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2월에,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켜나갔으나 이 일로 일경에 잡혀 감옥을 드나들게 된다.

 

“박차정 의사는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국내 활동을 하다가 잡혀 거의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1930년 2월, 이미 중국에 가서 독립활동을 하던 오라버니 박문희의 부름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혼인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셨지요.”

 

 

 

박차정 의사는 이후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하나로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자리잡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뽑혀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일에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의 일원으로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폈으며 1938년 4∼5월 무렵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무장궐기를 촉구하였다.

 

그 뒤 박차정 의사는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뽑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병이 깊어 1944년 5월 27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경에서 34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박차정 의사의 유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국내로 봉환되어 남편 김원봉의 손에 의해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되었다.

 

남편 약산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이력으로 김원봉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천궁(天宮)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우리집 뒤에 있는 논 가운데

뭇 개구리 소리 맞춰 노래합니다.

내 기억의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 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 박차정의사가 죽은 언니를 위한 시 일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34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독립투사 박차정 의사의 삶을 되돌아보는 생가 툇마루에는 천궁(天宮)으로부터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