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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는 충청을 대표하는 기악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5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충청지방의 기악(器樂) 중 대전지방의 줄풍류 이야기를 하였다. 줄풍류란 방중악(房中樂), 곧 실내에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가곡반주나 영산회상과 같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점, 문화재연구소의 《대전 향제 줄풍류 조사보고서》를 참고해 보면, 1960년대 당시 줄풍류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풍류객은 대금을 연주하는 권영세(1915년 생)로 그는 박흥태, 방호준, 김명진, 성낙준, 윤종선, 김태문 등에게 여러 악기를 배웠다는 점을 얘기했다.

 

그는 1965년, 대전율회와 <대전정악원>에서 실제적인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당시의 풍류객으로는 권영세 이외에도 7~8인이 있었다는 점, 충청풍류, 곧 내포풍류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대전 율계가 있었으나, 거의 유명무실해 졌다가 1960년부터 대전 현지의 권영세나 임윤수 등에 의해 활동이 재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대전지방의 민간풍류에 이어 이번 주에는 내포지방의 기악으로 가야금 산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충청지방의 가야금 산조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심상건이라는 명인부터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 만큼 그는 당대 가야금 산조 음악으로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심상건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894년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심창래)를 여의고 작은 아버지인 심정순 밑에서 자라며 심정순으로부터 가야금산조와 병창, 판소리, 민요, 장고 등을 배워 음악적 기본과 소양을 키웠다. 그의 조카에게 음악적 영향을 주었던 작은 아버지, 심정순 역시, 충청제 가야금 산조를 비롯하여 중고제 판소리, 가야금 병창 등에 뛰어난 국악인이었다. 또한, 그의 집안이 국악을 가업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1910년대 초반, 전통연희의 대표적인 공연장이었던 장안사의 간판스타였다면 그가 어떤 예인이었는가 짐작이 될 것이다. 심정순의 대한 소개는 별도로 중고제 판소리를 이야기할 때 구체적으로 하기로 한다.

 

심상건의 4촌 동생들인 심재덕이나 심매향, 심화영 등이 바로 심정순의 아들딸 들인데, 모두 아버지의 소리나 춤을 이어받았고, 특히 심화영의 승무는 현재까지 충남문화재로 이어지고 있다. 심정순의 손녀가 바로 대중가수 심수봉이다. 심상건은 이러한 예인을 배출해 낸 심(沈) 씨 가문에서 가야금과 판소리를 배우며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왔는데, 그는 1910년대부터 음반을 제작해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겉으로 들어난 1920~30년대의 일제강점기에 심상건이 활동해 온 공연내용은 당시의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소개되어 있어서 그가 어떤 곳에서 어떤 공연활동을 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공연활동이 매번 신문에 기사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 어려운 시기에 그의 활동범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도 짐작이 된다.

 

 

그는 주로 <조선정악대회>, <조선음악협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등 단체에 소속되어 단체와 인연을 맺고 가야금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해 왔는데, 특히, 무대 공연 이외에도 경성방송국의 출현 목록에 그의 이름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그의 방송활동은 활발했던 것이다.

 

심상건은 일제강점기에 가야금의 명인 강태홍이나 한성기, 또는 정남희나 안기옥, 김병호 등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음악인들과 당시 서울무대를 장악했던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0년~1930년대에 가야금산조를 녹음한 명인으로는 김해선ㆍ심상건ㆍ안기옥 등이 거론되고 있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서도 심상건은 산조 음반자료를 제일 많이 남긴 명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1925년부터 10여 년 동안 가야금 풍류를 비롯하여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단가, 판소리, 시나위, 민요, 기악합주, 무용반주 등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해서 약 40여 매의 음반을 취입하였으며, 조국 광복 후에도 가야금산조의 릴 테입을 남기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자료가 ‘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된 30여 분 소요의 가야금 산조인 것이다.

 

 

이 자료는 1960년대에 <국립국악원> 악사장이었던 김기수(金琪洙)에 의해 5선보로 채보되었으며, 1968년에는 또다시 황병기에 의해 가야금 주법에 맞도록 이조(移調)되어서 1968년 <5·16 민족상> 전국음악경연대회를 치를 때 가야금 부문의 지정곡이었다.

 

참가자들은 심상건의 산조를 배울 곳이 없어 주최 측이 마련해 준 악보를 받아들고 음원을 수없이 반복해 들으며 심상건류의 가야금 산조를 재현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이혜구 박사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 기억에 새롭다.

 

나라 밖에서 산조 음악 연주회가 끝나자, 외국의 기자들이 심상건 명인에게 “무슨 재미로 맨날 가야금을 타느냐”고 물었단다. 잠시 머뭇거리던 심 명인의 대답이 “헤헤, 그저 줄 풀고 죄는 재미죠!”라고 했다던가!

 

“음악이란 음의 운동으로 긴장과 이완을 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한 세계적인 음악미학의 대가 에두아르트 한슬릭(Aduard Hanslick)의 긴장과 이완이라는 표현이나 심상건의 풀고 조이는 재미가 같은 의미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심상건이 말한 줄을 죄었다 풀었다 하는 긴장과 이완의 대비가 곧 산조음악의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논리가 아님을 알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