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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백성을 위해 절제와 희생을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4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임금은 개인이며 나라

 

생각하는 세종의 마지막 실현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하고 연구하여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이는 신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이 결정하는 일은 개인의 일인가, 나라의 일인가.

 

화가위국 : 예조에서 계하기를, 전조(前朝) 말엽에 정치는 산란하고 민심은 이탈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이... ‘태조’를 추대하시어 ‘집을 변하여 새 왕조를 이룩’[化家爲國]하셨습니다.(《세종실록》즉위/9/11)

 

임금이 나라이면서 개인일 수 있는 근거는 왕조국가가 한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가령 양녕 문제에서 ‘이것이 비록 일가의 일이라 하여도 또한 나라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였다.

 

가사와 국사 : (상왕 태종이 양녕의 산릉 제사 참여를 못 하게 명하다) 이천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양녕으로 하여금 효령(孝寧)의 예에 따라 내왕간에 능에 가서 절[拜]을 드리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이것이 비록 한 집안의 일이라 하여도 또한 나라에 관계되는 것(此雖一家事, 亦係國家)이니, 그것을 대신들과 조용히 의논하여 계(啓)하도록 하라.(《세종실록》2/8/11)

 

그러므로 한 나라는 임금이 얼마만큼 성실하며 유능한가에 따라 흥망과 번영이 좌우될 수 있었다. 그만큼 개인의 능력이 중요했다.

 

생각하고 정밀하게 연구

 

백성의 일상 일거리와 나라의 공공 독점사업이 서로 부딪칠 때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소금 생산과 어업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찬성 등이 어염의 정책에 관하여 논하게 하다) 찬성 신개ㆍ호조 판서 심도원 등에게 명하여 어염(魚鹽, 생선과 소금)의 정책을 논의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적당한가 아니한가를 널리 물어서 조용히 생각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민폐가 없게 하라." (敎曰: "廣問便否, 徐思精究, 使無民弊) 하고... 이에 앞서 관에서 어량(魚梁)과 염조(鹽竈)도 없이 단지 그 세만 거두었는데, 이에 이르러 국가에서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구제함으로 인하여 창고가 모두 말라서 재정이 펴지 못하므로, 어량과 염조를 널리 두어서 그 이익을 거두어 흉년을 구제하는 준비책으로 삼고자 한 까닭으로 이 명이 있었다. (《세종실록》 19/4/12)

 

(참고 가) 어량 [魚梁] : 한 곳으로만 흐르도록 물길을 막은 뒤에,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

(참고 나) 어살(魚-) 또는 어전(漁箭) : 개울이나 강, 바다 등에 싸리, 참대, 장나무 등을 날개 모양으로 둘러치거나 꽂아 나무 울타리를 치거나 돌을 쌓은 다음 그 가운데에 그물을 달아 두거나 길발, 깃발, 통발과 같은 장치를 하여 그 안에 고기가 들어가서 잡히도록 하는 어로 방식, 또는 그러한 장치를 가리킨다.

(참고 다) 염조(鹽竈) : 소금을 만드는 솥.

 

이어 7일 뒤 다시 논의가 따른다.

(어염 문제에 관하여 신개 등에게 논의하게 하다) 찬성 신개 등을 불러 논의하기를, “소금을 굽는 일은 내가 그 요령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유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법을 논의해 정하기를 마치지 못하였으되, 헌부에서는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러나 만약에 그 요령을 얻어 마음으로 결정하였다면 비록 말하는 이가 있을지라도 내 동요(動搖)하지 않겠지만, 논의하기를 이미 오래 하였는데도 그 요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도 이 법을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노라.

 

이제 경들이 또 이르기를, ‘관에서 소금을 구우면 모름지기 사사로이 굽는 소금을 금해야 관의 소금을 백성에게 널리 펼 수 있고 나라에도 수입이 많을 것인데, 사사로이 굽는 자가 많다면 하필 관의 소금을 구하리오.’ 하고, 또 이르기를, ‘소금을 굽는 일은 마땅히 소금 굽는 집[鹽漢戶]으로써 그 일을 주장하게 하되, 선군(船軍, 왜군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수군)과 공천(公賤, 죄를 지어 관아에 속하게 된 종)은 그 일을 돕게 함이 어떠냐.’고 하니, 나도 생각하기를, 사사로이 굽는 소금을 금하고 관에서 그 이익을 오로지하면 재물을 취하는 데 가까우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선군을 사역하여 소금 굽는다는 것도 마침내 폐단이 없을는지 내가 심히 이를 어려워하노니, 경들은 그것을 익숙하게 논의하여,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익됨이 있으며, 소금을 도매하여 재물을 취한다는 비난이 없게 하라.” 하니, 신개등이 논의하기를,... 만일 공염을 굽는다면 사염을 마땅히 금할 것이며, 또 염한(소금을 굽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서 염군이라 일컫고, 양인으로서 공이 있는 자에게 그 벼슬을 상주고, 또 염조(鹽竈)를 주어 그 사(私)를 편리하게 하면 거의 스스로 권하여질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19/4/20)

 

이를 정리하면

가) 소금을 굽는 일은 어떻게 하여야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유익하게 할 수 있을까.

나) 헌부에서는 중지하기를 청했으나,

- 관에서 소금을 구우면 모름지기 사사로이 굽는 소금을 금해 관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 그러니 선군을 사역하여 소금 굽는다는 것도 마침내 폐단이 없을는지

- 경들은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익됨이 있으며, 소금을 도매하여 재물을 취한다는 비난이 없게 하라 등이다.

 

나라가 개인의 하는 일을 빼앗지 않고 공과 사의 조화를 이루려 했다. 이렇게 백성의 이익을 생각한 세종의 다음 행보에는 무엇이 있을까.

 

스스로 절제, 자기희생

 

세종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절제하는 일을 수행했다. 재난을 당해서 세종은 친아들ㆍ친손자의 과전(科田)을 감하게 하여 솔선수범(nobless oblige)하였다.

스스로 줄이기 : 나의 잘못으로 하늘의 뜻을 허비하고 쓸데없는 일을 꾸며, 그 대가로 부른 재앙이 있는가 생각되어 내가 심히 부끄럽다. 그 나머지 종성(宗姓, 종친)들의 과전은 갑자기 감할 수 없으므로 친아들ㆍ친손자의 과전(科田)을 감하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은 어떠한가.... 앞으로 대군의 밭은 2백 50결에 지나지 말게 하고, 여러 군의 밭은 1백 80결에 그치게 하라, 하고, 드디어 호조에 명하여 영구한 법으로 만들었다. (《세종실록》19/1/12)

 

(참고) 결(結) : 세금을 계산하기 위하여 사용한 농토의 넓이 단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문종 때까지 1결의 넓이는 사방 640척이 차지한 정방형으로 15,447.5㎡가 된다. 세종 26년(1444)부터는 6등급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1등전 1결의 넓이는 고려 때 하등전 1결의 3분의 2의 넓이로, 그 넓이는 주척 477.5척 사방의 정방형으로 하였다. 따라서 1등전 1결의 넓이는 9,859.7㎡로 변했다.

 

고려 말 조선 건국 초기에 토지문서를 태워 일거에 고려 훈구 세력들의 토지를 정리한 일이 있었다. 사회적인 개혁의 시초였다. 토지는 농사를 짓는 농민이 가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여기에 솔선하여 아들, 손자의 밭을 줄이게 된 것이다. 이런 백성을 우선시하는 세종의 생각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헌신으로 이어진다.

 

자기 헌신

 

세종의 마지막 행도(行道)는 자기희생에 따른 헌신이다.

몸의 수고 : 내가 만일 곧 잊어버려서 덮어두고 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몸에도 좋겠다. 다만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주라.’(身當其勞, 以逸遺後)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28/6/18)

 

내 몸이 고달프더라도 뒷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정신은 세종의 근면함을 통한 희생정신으로 나타난다.

 

글 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讀書有益如寫字製作 人君不必 留意也。(<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 조 고사본말)

 

세종은 스스로 임금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글을 읽고 깨달아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직(職)이며 업(業)이라고 여겼다. 실용적인 정신의 임금이었다.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글을 읽었고 《좌전》, 《초사(楚辭)》 같은 책은 백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한 데도 글을 읽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병풍 사이에 책이 한 권 남아 있었는데 《구소수간(歐蘇手簡)》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로도 반증이 되고 있다.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가) 신중한 생각과 연구 나) 스스로 규제하고 다) 자기희생을 통해 뜻한 바를 실천해 간다. 이것이 세종의 생각하는 정치 곧 백성과 사맛하는 세종의 모습이다. 요즘 ‘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 유지라는 이야기가 매일 나오고 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사람 간 대화를 나눌 때 유지하는 거리냐인데 공적 혹은 친밀한 사적으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다르다는 것으로 가령 연인 사이는 팔짱을 끼고 다니고, 일반적인 교유에서는 50센티 이상 떨어져 이야기하는 게 보통인데 지금은 2미터 이상 떨어지라는 것이다. 요즘은 병든 시기에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연구하여[서사정구徐思精究], 스스로 규제하고, 자기 헌신을 통해 백성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세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