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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터키를 현대 국가로 발전시킨 케말 파샤

한국인이 별로 찾지 않는 에르주룸과 에르진잔
생명탈핵 실크로드 방문기 2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에르주룸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188km 떨어진 에르진잔에 가는 날이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시간이 많이 남았다. 기차표는 이미 예매해 두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병산은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근처에 있는 케말 파샤 기념관으로 걸어가서 구경하고 오겠다고 한다. 나는 이틀 전인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하여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나는 병산에게 역에서 쉬겠다고 말했다. 아래 사진 두 장은 병산이 찍어온 것이다.

 

 

 

에르주룸 기차역에서 의자에 앉아 손말틀(휴대폰)로 무스타파 케말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무스타파는 1881년에 마케도니아 지방의 큰 도시 테살로니카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슬람 학교가 아닌 일반 사립학교에 보냈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터키의 관습대로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하여 그냥 무스타파였다. 그런데 수학교사가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그에게 완벽하다는 뜻의 ‘케말’을 별명으로 붙여주었다. 무스타파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어서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다. 그는 오스만 군사대학을 1905년에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한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왕정 체제에 반감을 느끼고 청년튀르크당에 가입하고 혁명세력에 가담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군과 싸우게 된다. 그는 대령이 되어 제19사단의 지휘를 맡았는데, 1915년 4월 겔리볼루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하고 값진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고 이때 얻은 칭호가 ‘파샤(지휘자라는 뜻)’이며 이후에 그는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이름보다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리스와 러시아가 오스만 영토에 진출하고 오스만 제국은 분리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케말 파샤는 나라 밖 점령 영토는 포기하더라도 터키의 고유 영토는 지키자는 목표를 세우고 1919년에 터키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1922년에 케말 파샤는 술탄 제도를 폐지하고 1923년에 연합군과 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터키의 영토를 인정받고 케말 파샤는 터키 공화국을 세우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 정ㆍ교 분리와 남녀평등을 헌법에 명시하는 등 매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터키를 현대화된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헌신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터키의 영토를 지키고 터키를 현대 국가로 발전시킨 것은 순전히 그의 공이다. 1934년 터키 국회는 그에게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경칭을 수여했고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urk)가 되었다.

 

15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그는 건강이 나빠져 1938년에 57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터키인들은 한결같이 “아타튀르크가 없었다면 터키는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의 동상과 사진은 터키 어느 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타튀르크야말로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정도로 문과 무를 겸비하였고 아직 터키인의 사랑을 받고있는 진정한 국부(國父)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터키 동부는 고원지대이다. 손말틀의 고도계로 재보니 1,200m가 나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가끔 초원이 보이고 가축이 풀을 뜯어 먹는 모습도 보였다. 먼 산의 북사면에는 정상 부근에 잔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멀리서도 하얗게 보였다. 창밖으로 하천이 보이기도 하는데 수량은 많지 않고, 아마도 눈 녹은 물이 흐를 것이다. 이따금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로자 씨가 가지고 온 한글판 터키 관광안내서를 읽어보니 에르주룸과 에르진잔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찾지 않는 도시라는 의미이겠다.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한 에르진잔 역은 아주 작고 도시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역사를 나오니 아무런 건물도 가게도 없고, 그저 버스정류장만 달랑 있었다. 병산이 구글 지도를 확인하더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2.7km밖에 안 되니 걸어가자고 한다. 아무도 순례단장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여행객이 아니고 순례자이다. 배낭을 메고 여행 가방을 끌고 네 사람은 터덜터덜 걸어갔다.

 

조금 걸어가니 시가지가 나타났다. 고층 건물도 없고 규모는 작지만 잘 정돈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가로등 사이로 모스크가 보였다. 가로등은 디자인이 아름다웠다. 가로등마다 터키 국기가 가운데에 새겨져 있었다. 마침 기도 시간인 듯 모스크의 첨탑에서 아잔이 흘러나왔다. 첨탑의 중간에 스피커가 보였다.

 

모스크는 하나가 아니었다. 곳곳에 모스크의 첨탑이 보였다. 모든 사람이 모스크로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줄지어 걸어가는 우리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마침내 주택가에 있는 작은 호텔에 도착했다. 깨끗한 호텔이었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네 사람이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에 로자 씨 모녀는 시장 구경 가고 병산과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간단히 양말과 내의를 손빨래하고 나서 휴식을 취했다. 인터넷에서 에르진잔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에르진잔은 터키 동부 유프라테스강 북쪽 유역에 있는 작은 주이다. 인구는 2017년 현재 96,000명이니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은 군 수준이다. 해발 1,200m의 기름진 평원에 만년설이 덮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통의 요지로 앙카라에서 에르주룸을 잇는 철도와 간선도로가 지나며 작은 공항도 있다.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따뜻하다. 물이 풍부하고 목화, 곡물, 과일 등을 재배하며 가축도 많이 기른다.